'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최민지 인턴기자]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팽이, 90년대 K리그 그라운드를 누비던 이상윤(48)도 그랬다.


화려한 입담을 뽐내며 '가레스 상윤'이란 별명도 얻은 축구 해설위원 이상윤, 그의 현역시절도 입담만큼 화려했다. 빠른 발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기교파 윙어로 국내 최초로 헛다리 짚기 기술을 사용했으며 90년대 초반 일화 천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1990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드래프트 1순위로 일화에 입단한 그는 이회택 감독이 이끈 1990이탈리아월드컵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화제를 모았다. 아쉽게도 본선 무대에선 벤치만 지켰지만 참가만으로도 큰 자신감을 획득, K리그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3시즌부터 1995시즌까지 일화가 K리그 3연패를 하는데 가장 큰 활약을 했던 건 이상윤이었다. 1993년엔 K리그 MVP를 받았고, 1996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차지했다. 그 기간 써내려간 기록만 봐도 그의 화려했던 현역 시절을 실감할 수 있다. 1995년 20-20클럽 가입을 시작으로 1996년 30-30, 2001년에는 40-40클럽에 가입했다.


힘든 시기도 있었다. 1995년 당시 일화를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과 마찰을 일으켜 임의 탈퇴되는 아픔을 겪었다. 3개월 뒤 다시 복귀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그해 포항과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 연장 전반 14분 극적인 헤딩 결승골을 터트리며 일화의 리그 3연패를 이끌었다.


1997년 박종환 감독이 해임된 후 부임한 벨기에 출신 레네 감독은 그의 기교를 높이 평가해 중용했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그때 활약을 눈여겨본 당시 차범근 국가대표 감독이 1998프랑스월드컵 대표팀에 이상윤을 발탁했다.


최종예선에서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후반 42분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기 직전 극적인 역전골을 터트리며 에이스로 우뚝 올라섰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달랐다. 첫 경기였던 멕시코전 직전 몸을 풀다 김태영의 강슛에 얼굴을 맞고 기절했던 그는 최악의 컨디션을 보였고, 조별리그 탈락과 함께 많은 비난을 받았다.


1999년 이상윤은 프랑스 리그의 FC 로리앙으로 임대 이적해 새로운 도전을 예고했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5경기 만에 다시 국내로 복귀했다. 성남 일화에서 방출된 그는 부천SK(현 제주)로 이적했지만, KBS '출발 드림팀' 녹화 도중 팔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재기에 실패했다.


<1999년 1월 16일 스포츠서울 7면>


이상윤, 11억 원 프랑스행 - 98월드컵 예선 특급활약에 거액 베팅

'팽이' 이상윤(30·천안일화)이 프랑스 1부리그 FC로리앙으로 이적한다. 98프랑스월드컵 출전 이후 해외 진출을 모색해온 이상윤은 오는 17일 프랑스로 출국, 로리앙 클럽에서 메디컬 체크를 받은 뒤 19일께 이적 계약을 맺을 예정이다.


이적료 70만 달러(8억 4천만 원)에 연봉은 20만 달러(2억 4천만 원)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 기간은 현지에서 결정될 예정. 지난해 1월 서정원이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한 데 이어 한국선수로는 두 번째 프랑스 1부리그 진출이다.


로리앙클럽은 지난 시즌 2부리그에서 2위를 차지, 98~99시즌 1부리그로 승격된 팀으로 1926년 창단했다. 로리앙은 파리에서 서쪽으로 390km 떨어진 대서양의 해안 도시다.


올 시즌 4승 9무 7패로 18개 팀 중 15위에 머물자 새해 들어 외인 선수를 급히 물색해왔다. 특히 팀 득점이 17골로 게임당 1골에도 못 미치자 골게터를 급히 찾았다.


로리앙의 크리스티앙 구르퀴프 감독은 98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보여준 이상윤의 강도 높은 골 솜씨를 크게 인정해 선뜻 낙점했다. 이상윤은 국가대표 A매치 30게임에 출전, 12골을 기록했다.


이상윤은 최근 여수 전지훈련 중 상경, 분당 집에서 개인 운동을 하고 있다.


1990년 일화천마에 입단, K리그에 데뷔한 그는 1993년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98년 중국과 다이너스티컵 축구대회 2차전에서 역전골을 작렬시킨 이상윤(왼쪽)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달려 나오고 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한국 국가대표팀 이상헌(왼쪽)과 이상윤이 스포츠서울 열독 삼매경에 빠져 있다.


1998년 중국과 평가전에서 '팽이' 이상윤이 전반 16분 통쾌한 오른발 슛으로 선취골을 터뜨리고 있다.


'2000년 올해의 프로축구대상' 7월 첫째 주 주간 MVP에 선정된 이상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0년 올해의 프로축구대상' 9월 MPV도 수상한 이상윤.


결국, K리그에서 통산 293경기를 치르고도 은퇴식 없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마무리는 아쉬웠지만, 현역 시절 피지컬의 약점을 딛고 쓰러질 듯 다시 일어서던 그의 '팽이' 같은 모습은 지금도 축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은퇴 후 차범근 축구교실의 코치 생활을 거쳐 부산 아이파크, 성남 FC, 건국대학교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그는 현재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축구 해설가로 현역 시절 못지않은 주가를 달리고 있다. 오는 4일, 긴 시간 그라운드 주변을 맴돈 '축구인' 이상윤의 못다 한 이야기를 공개한다.


julym@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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