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학
안영학이 지난 12일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경기장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 남북전을 지켜보고 있다.

[도쿄=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남·북·일이 이렇게 일본에 모여 경기하는 것을 보니….”

지난 8일부터 일본 도쿄와 지바에서 열리고 있는 동아시안컵을 안영학(39) 만큼 감회에 젖어 바라보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과 한국에서 프로 생활을 한 그는 북한 국가대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이렇게 남·북·일을 넘나들며 경계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어느 국적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 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한국이나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살아가는 재일교포, 즉 조선적으로 아직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안영학에게 남과 북, 일본의 남·녀 선수들이 자신의 터전인 일본에 모여 축구 경기를 벌이는 모습은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그는 “내가 선수 생활을 했을 때도 이런 대회가 있었다면 너무 좋았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선수 생활을 할 때도 일본에서 동아시안컵이 열리긴 했지만 북한은 불참했고 대만이나 홍콩이 대신 참가했다.

안영학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만나 단독 인터뷰를 한 날은 사상 최초로 남자축구 남·북대결이 일본에서 벌어진 지난 12일이었다. 기자가 지난 4월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여자축구 남·북대결에 동행해서 찍은 사진을 함께 보면서 그와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안영학은 이번 대회 개막 직전에 열린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심포지엄에 북한 측 패널로 참가하는 등 자신의 미래의 꿈으로 설정한 ‘동아시아 축구 행정가’ 과정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홍명보 감독님 유니폼을 입고 응원했는데 이번에 만나 대화하게 됐다”며 기뻐한 그는 “EAFF만 해도 회원국이 10개 나라나 된다. 한 나라씩 찾아다니면서 어린이들과 공도 차고 소통하는 역할을 맡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한국과 북한, 일본 등 동아시아 전 지역을 넘나들 수 있는 안영학이 그런 역할에 제 격이란 생각도 들었다.

지난 3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현역 생활 마감을 선언한 안영학은 8월 도쿄조선중고급학교에서 은퇴 경기도 치렀다. 지금은 일본의 조선학교 3곳에 유소년 축구교실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 전역을 누비며 강연도 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에 박지성의 인터뷰를 봤는데 ‘(히딩크나 퍼거슨 같은)훌륭한 감독들 밑에서 뛰어보니 난 지도자를 못 할 것 같다’고 한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감독 자질이 없는 것 같아 프로 지도자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행정가의 길을 가려고 한다. 공부를 더 해야할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EAFF에서 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유소년과 행정가의 접점을 찾는 것 역시 박지성과 비슷하다.

안영학은 지난 8~9월 4년 만에 한국을 찾아 친정팀인 부산과 수원을 찾았다. 8월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이란전도 관전하고, 대한축구협회를 찾아 정몽규 회장도 만났다. 정 회장은 그에게 “남·북 축구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부산은 거의 10년 만에 갔는데 수원에서 만났던 최만희 2군 감독이 부산 대표이사로 계시더라. 즐겨먹던 곱창을 다시 맛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며 웃었다. 이번 동아시안컵 기간엔 북한 선수단과 축구인들을 만났다. 그는 “지난 10일 남자대표팀 숙소에 같은 재일교포 리한재와 함께 찾아가 과거 대표팀 감독을 하셨던 윤정수 단장을 만났다. 현재 대표팀을 맡고 있는 요른 안데르센(노르웨이) 감독과도 대화했다. 안데르센 감독과 얘기해보니 인품이 너무 좋은 분이셨다. 선수들이 순진하니까 안데르센 감독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안영학
안영학이 지난 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공 | 안영학

안영학은 지금의 남·북 대치 관계를 푸는 수단으로 축구가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축구 만큼 양측에서 인기를 얻는 스포츠도 없기 때문이다. 남측은 남자 축구가 강하고, 북측은 여자 축구의 수준이 높다. 그는 “다른 종목들도 교류하면 좋다. 그런데 축구가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남·북 친선경기를 해야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한 뒤 “내가 행정 쪽에서 서로의 교류전 등을 돕고 싶다. 더 나아가 코리아 단일팀과 일본의 친선 경기 같은 것도 추진할 수 있다. 내가 (북한)대표로 뛸 때 남아공 월드컵 예선 북한 홈경기를 중국 상하이에서 했다. 아쉬웠다. 한국 선수들도 평양에 한 번 오고 싶어했던 것 같더라. 어떻게 보면 다 같은 조국인데…”라며 다신 이런 아픔이 없어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남과 북의 축구가 계속 발전해야 교류도 재개될 수 있다. 안영학은 우선 한국에 대해선 “이란전도 봤지만 상대가 잘 하더라. 아무래도 월드컵 4강에 들고 그랬으니 기대치가 큰 것 같다. 내가 (한국의)모든 경기를 본 것은 아니지만 선수 개개인의 실력은 좋은데 그게 팀으로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응집력이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북한에 대해선 “일본전은 이길 수 있는 찬스였는데 아쉽게 됐다. 그래도 지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갈 땐 나가고, 또 젊은 선수들이 많이 뛰면서 자신감을 얻는 모습은 좋아 보였다. 요즘은 선수들 사이에서 ‘잘 하면 유럽으로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며 2020년 도쿄 올림픽,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본선행을 기원했다. 그는 아울러 “이번 대회에서 (북한 대표팀이)유니폼 스폰서도 없이 와서 안타까웠다. 치료기나 테이핑도 충분하지 않다. 내가 돕고 싶다”며 열악한 북한 대표팀의 개선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꿈꾸는 남·북 축구 교류, 동아시아 축구의 단합은 경기장에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안영학은 “다들 경기만 하고 갈 것이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 식사도 같이 하며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선수들이 여기 재일교포들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며 업그레이드된 동아시안컵의 모습도 소망했다.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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