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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체 피체렐리의 ‘루크레티아를 능욕하는 타르퀴니우스’ 월레스 컬렉션소장

[스포츠서울 이주상기자] 심상치 않은 장면이다. 나신의 여인을 한 남자가 칼을 든 채 위협하고 있고 그림 속 왼쪽의 남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여인은 저항하기 위해 두 팔로 남자의 몸을 잡아 보지만 남자의 완력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서슬 퍼런 칼까지 쥐고 있으니.

능욕을 바로 앞에 둔 여인의 이름은 루크레티아이고 칼을 든 남자는 당시의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아들인 섹스투스이다. 기원전 509년에 벌어진 일이다. 루크레티아는 아름다운 미모와 고결한 성품으로 당대를 풍미한 여성이었다. 또한 높은 지조로 인해 촉망받는 정치가였던 남편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와 함께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남편은 섹스투스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섹스투스는 전부터 아름다운 루크레티아에게 흑심을 품어왔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남편이 부재중임을 알고 시종과 함께 그녀의 집을 찾은 것이다.

루크레티아의 집을 찾은 타르퀴니우스는 다짜고짜 그녀를 위협하며 욕심을 채우려 들고 있다. 루크레티아는 완강히 저항하지만 속수무책이다. 결국 타르퀴니우스의 위협에 굴복하며 몸을 내주고 만다.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타르퀴니우스가 내뱉은 협박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루크레티아에게 “너와 너의 하인을 죽이고 ‘둘이 간통해서 내가 죽였다’고 소문을 퍼트리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왕자의 신분이자 친척간이어서 그가 그녀의 집을 찾는다는 것이 별반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루크레티아는 하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또한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흑심을 채운 타르퀴니우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궁궐로 돌아갔다. 전부터 탐했던 여인을 정복했다고 생각한 타르퀴니우스는 남편의 부재 때마다 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루크레티아는 집으로 돌아 온 남편과 지인들 앞에서 타르퀴니우스와 있었던 일을 고백하며 스스로 목숨을 끓은 것이다. 정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이었다.

남편인 콜라티누스와 그의 친구이자 명망 있는 정치가였던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복수를 다짐했다. 공포정치로 인해 민심을 잃고 있었던 차에 발생한 사건은 기름에 불을 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루크레티아가 능욕 당했다는 소문은 로마제국 전체에 급속히 퍼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품은 거대제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경기도 크기만 한 보잘 것 없는 도시국가였다. 작은 나라에 소문은 급속히 퍼져 온 국민이 알게 됐다.

전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던 왕과 아들의 행위에 로마시민들은 분노했다. 분노는 궐기로 이어졌고, 궐기는 봉기로 촉발됐다. 결국 콜라티누스와 브루투스를 앞세운 시민군은 왕정을 타도하며 공화정을 수립했다. 한 여인의 죽음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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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퀴니우스의 의상은 고대로마의 의상이 아닌 17세기의 의상이다. 고대로마의 귀족은 ‘토가(toga)’라고 하는 길게 주름진 옷을 주로 입었다. 화가들은 종종 고증의 어려움 때문에 당대의 옷을 소재로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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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퀴니우스의 시종이 능욕장면을 응시하고 있다. 화가들이 많이 차용했던 ‘관음증’의 한 유형이다.

▶로마제국의 초석 -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한 이래 250여년 만에 왕정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됐다. 공화정 수립 이후 로마는 비로소 제국의 위용을 갖추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을 귀속시켰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후에는 지금의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를 비롯해서 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했다. 그 이면에는 공화정을 통한 민주주의의 발달이 컸다. 로마시민들은 누구나 법을 통해 권리를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업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중세 봉건제도보다 우수한 법체제와 자유를 만끽하며 식민지 확장을 통해 제국의 부를 쌓아 갔다. 우리가 아는 화려한 문명의 고대 로마제국의 초석을 공화정이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로마공화정 - 역사상 최초의 시민 중심의 공화정이다. 그동안 세습을 통해 왕정과 제정으로 통치가 이루어졌으나 루크레티아 사건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은 개인이 아닌 귀족과 시민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다른 과두적 성격이 강하지만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공화정을 통해 로마는 국력이 급신장했다. 당시 최강의 국가였던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스키피오가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함과 동시에 유럽을 제패했다. 공화정 수립 후 450여년 만에 걸출한 영웅 줄리어스 시저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다시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지만 로마의 ‘1000년 영광’은 공화정을 통해 수립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 동양의 공화(共和) - 비슷한 시기에 동양 인문주의의 원천인 유학(儒學)의 공자(기원전 551~ 479년)가 활동했다.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중국대륙이 사분오열되며 격동을 겪던 시기였다. 공화정은 영어로 ‘Republic’이라고 쓴다. 라틴어 ‘Respublica’가 어원으로 ‘대중의, 공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한 개인의 절대 권력이 아닌 원로원, 집정관, 민회 등이 권력을 나눈다는 의미로 오늘날의 삼권분립 정신과 상통한다. 이상주의자 공자는 친족이 아닌데도 평화롭게 황제의 자리를 내준 전설상의 황제 요순(堯舜)의 ‘선양(禪讓’) 제도와 더불어 주나라 시대 소공과 주공이 14년(기원전 841~827년) 동안 서로 협력하며 정치를 하던 시기를 ‘共和’(공화)라 지칭하며 이상시대의 모범으로 삼았다. 의미상으로 동서양이 통하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지도자였던 공자조차도 전제(專制)가 아닌 공화주의를 이상으로 삼을 정도로 민주주의 정신은 고대부터 싹을 틔웠으나 로마는 실천했고, 동양은 그렇지 못했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산업혁명’과 함께 로마공화정의 정신을 이은 민주주의가 서양이 세계를 제패했던 이유로 꼽고 있다.

▶ 펠리체 피체렐리(Felice Ficherelli, 1605~1660) - 바로크 시기의 이탈리아의 화가다. 투스카니 지방에서 주로 활동했다. 투스카니의 유력한 집안인 콘테 바르디의 후원으로 피렌체에서 당대의 유명화가 야코보 엠폴리 밑에서 공부했다. 그의 작품에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다. ‘느긋한 펠리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루크레티아를 능욕하는 타르퀴니우스’를 비롯해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등이 있다.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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