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이게은 인턴기자] 배우 채림이 하이틴 스타에서 한류스타로 인생 제2막을 연 데 이어 한 아이의 엄마로 제3막을 열었다.


채림은 지난 1992년 13세에 청소년 드라마 '사춘기'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수차례 광고 출연과 더불어 드라마 '뜨거운 강', '갈채', '엄마의 깃발' 등에 출연하며 연기자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지만 크게 조명받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가 주목받기 시작했던 건 1999년 드라마 '카이스트'를 통해서다. 채림은 당시 과감하게 숏커트 헤어스타일로 중성적인 캐릭터를 연기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시는 여배우들이 극중 숏커트를 선보이는 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학생들과 잘 어울리고 갈등을 봉합하는 적극적인 해결사 모습을 연기로 잘 녹여내 주목받았다.


채림은 드라마가 아닌 연극과 뮤지컬에도 도전했다. 1999년 연극 '딸부잣집', 2000년 '약한 자의 슬픔', 2001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 출연하며 연기의 폭을 넓혀나갔다.


채림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드라마는 1999년 방영한 드라마 '사랑해 당신을'이다. 채림은 배우 감우성과 사제지간의 사랑을 연기했고 솔직하고 발랄한 여고생으로 변신해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드라마로 같은 해 MBC연기대상시상식에서 '인기상'과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방영한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서는 배우 장동건과 사랑에 빠지며, 김소연과 라이벌 관계인 아나운서를 연기했다. 이 드라마는 당시 큰 인기를 끌었고 채림을 청춘스타 반열에 오르게 했다. 방영 10년 후인 2010년 채림은 중국판 '이브의 모든 것'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드라마 '네 자매 이야기', '지금은 연애중', '저 푸른 초원 위에'에 출연하며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2003년 가수 이승환과 결혼했다. 이듬해 중국 드라마 '양문호장'. '정정애금해', '설역미성', '신취타금지'에 출연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 한류스타로 발돋움했다.


일도 사랑도 모두 쟁취한 듯했던 채림에게 잠시 삐걱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이혼이었다. 2006년 채림은 2년 10개월을 이어가던 부부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굴곡이 생기긴 했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잠시 공백기를 가지며 오히려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고 2007년 드라마 '달자의 봄'을 통해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능청스럽기도 하고 때론 소녀처럼 여리기도 한 이중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30대 노처녀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그는 '달자의 봄'으로 KBS연기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얻었다.


2007년 중국 BQ시상식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시아 스타상'도 수상하며 승승장구했고 드라마 '강적들', '잘했군 잘했어', '오! 마이 레이디'에도 출연해 주연 배우로서 탄탄한 입지를 증명했다. 한국 활동을 하면서도 중국 드라마 '애상여주파', '사아전기'에도 출연하며 위상을 떨쳤다.


또다시 열심히 달려서였을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2013년 방영한 중국 CCTV 드라마 '이씨가문'에서 중국 톱스타 가오쯔치와 부부로 호흡을 맞추다가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사랑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2014년 10월에 웨딩 마치를 울렸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결혼생활을 했고 SNS를 통해 알콩달콩한 일상을 공개해왔다. 그러던 지난 8월, 결혼 3년 만에 임신 6개월임을 알렸고 지난 12일 출산 소식을 전했다.


볕이 드리우던 인생에 잠시 구름이 낀 적도 있었지만 채림은 배우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도전장을 냈다. 이러한 행보가 있었기에 한류스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배우로서 영예뿐만 아니라 엄마가 되는 감격도 누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채림의 묵묵한 발걸음이 꽃길을 연 만큼, 배우 채림과 인간 박채림의 모습으로 그려나갈 미래가 더욱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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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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