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시즘 in 아트]"사랑과 욕망의 끝은?", 소로야의 '검투사의 품에 안긴 메살리나'
    • 입력2017-12-07 17:19
    • 수정2017-12-0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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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소로야의 ‘검투사의 품에 안긴 메살리나’ 53x80cm 개인소장
[스포츠서울 이주상기자] 대리석이 눈부신 화려한 저택의 두 남녀. 탄탄한 구릿빛 근육의 남자 품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이 젖가슴을 드러낸 채 다가온다. 남자의 오른쪽에 투구가 널 부러져 있는 것을 봐서 두 사람은 곧 뜨거운 정사에 들어갈 태세다. 멀리 신전이 보이고 저택의 벽은 다양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가의 그리스풍의 도자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 보통 신분의 집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놀랍게도 저택은 로마제국의 황제인 클라우디우스(BC 10 ~ AD 54) 가 거처하는 궁궐이고 요염한 여인은 그의 부인인 황후 메살리나(AD 2 2~ 48)다. 그림 속 남자는 군인이 아닌 검투사로 ‘그냥’ 검투사일 뿐이다. 검투사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투구의 모양이다. 전투를 치루는 군인이 착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화려하다. 그런 투구는 싸움에 지장을 줄 뿐이다. 로마시민의 최대 오락거리인 검투경기에 동원된 검투사는 요즘말로 화려하게 입고 치장해야 하는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 투구 또한 크고 화려했다.

지고지순한 신분의 황후지만 메살리나는 대담하게도 대낮에 무명의 검투사와 정사를 벌이고 있다. 사랑하는 남자일까? 황제 몰래 숨겨둔 연인일까?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검투사로서 잘생기고, 튼튼하고, 억센 남자라는 사실이다. 검투사는 노예출신이 많았다. 원형경기장에서 상대방을 이기면 인기는 물론 신분도 상승했다. 때론 자유인이 되기도 했다. 황후가 부르는데 마다할 검투사가 있을까. 겁이 나서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형경기장에서 보여준 늠름함으로 인해 메살리나에게 찍힌(?) 검투사는 황후의 부름에 따라 구중궁월에 들어와 그녀의 ‘육욕’에 충실할 뿐이다. 황후의 마음에 들면 자유인이 될 수 있거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벌건 대낮에 자신의 임무에 더 할 나위 없이 힘(?)을 쏟고 있다.

로마 귀족가문 출신인 황후 메살리나는 15세에 왕족인 클라우디우스의 세 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갔다. 당시 귀족간의 결혼이 그렇듯 정략결혼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성적으로 반 불구의 신세였다. 행운일까? 불행일까? 17세 되던 해에 남편인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전임 황제가 악명 높은 칼리굴라(AD 12 ~41) 황제로 그의 패덕에 힘입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안았다.

하지만 꽃다운 나이의 메살리나는 궁전생활이 지루할 뿐이었다. 남편 또한 아내보다는 제국의 일에 충실 하느라 메살리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 무료함은 비극을 낳았다. 어리지만 알건 다 알고, 배울 건 다 배운(?) 메살리나는 황후라는 권력을 이용해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에 잘생기고 멋진 남자는 그녀의 침대에 초대됐다. 거부하면 죽음뿐이었다. 이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밤은 모든 것을 숨기고 은밀하게 만든다. 게다가 감춰져 있던 욕망을 분출시키기도 한다. 낮의 정사에 만족하지 못했던 메살리나는 꾀를 냈다. 밤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메살리나는 로마의 유곽에 자신의 돈으로 가게(?)를 열었다. 스스로 창녀가 된 것이다. 그것도 적극적인 창녀였다. 보통 유곽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를 선택하지만 메살리나는 그 반대였다. 유곽을 찾는 남자들 중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보면 메살리나가 먼저 유혹했다. 또한 남자가 크나큰(?) 즐거움을 선사하면 화대는 사절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일 또 와요’ 라고. 그런 영업정신(?)에 힘입어 메살리나의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메살리나의 욕정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쉴 새 없이 매일 매일 이어졌다.

그런데, 밤도 지쳤을까? 커튼의 틈새로 빛이 스며들듯 그녀의 행각도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너그러운 남편의 용단에 감추어 졌다.(본인이 성 불구자였으니 아내에게 미안했을 법도 했다) 얼마동안의 회개(?)의 날을 거친 후 메살리나는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택을 잘못했다. ‘그냥’ 남자들만 만났으면 별 탈이 없었을 텐데 너무 멋진 남자를 만났던 것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가이우스 실리우스. 로마제국의 집정관으로 야망에 불타는 사나이였다. 실리우스는 ‘욕정의 화신’ 메살리나에게 완벽한 육욕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마약을 선물했다. 이제 메살리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복종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난생처음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에 눈이 먼 메살리나는 계략을 꾸몄다. 남편이 원정을 떠난 사이 실리우스와 결혼을 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옹립한 후 두 사람이 새로운 황제의 섭정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투르기 짝이 없었던 메살리나의 계략은 이내 탄로가 났고 실리우스는 극형에 처해졌다. 이번에도 무던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내를 용서하려 했지만 원로원 등 제국의 수뇌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몇 달이라는 불안한 유폐생활 끝에 메살리나는 원로원에서 보내 자객에 의해 조용히 살해당했다.

ㄱㄴ
우윳빛의 메살리나와 구릿빛의 검투사. 육체를 통해 확연히 대비되는 색감으로 인해 감상자들로 하여금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ㅇ
검투사의 투구가 크고 화려하다. 로마시민들의 오락거리에 불과했던 검투사였기에 투구 또한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다. 군인들의 간결하고 튼튼한 투구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ㅊ
그리스 풍의 도자기는 저택이 남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마시대에도 그리스 도자기는 귀족들의 일급 수입품이었다.

▶ 메살리나는 희대의 창녀이자 음란함의 대명사였다. 이탈리아에서 ‘메살리나’를 언급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모욕과도 같은 말이다. 하지만 정략결혼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결혼 생활, 삶의 무료함 속에서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자신의 욕망과 권력에 충실했다. 사랑, 섹스, 죽음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화두로 삼는 말들이고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는 단어들이다. 메살리나의 삶을 보면 세 단어가 절로 연관되어 진다. 메살리나는 2000년전에 죽었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검투사(Gladiator) - 우리에게 검투사 하면 리들리 스콧 감독,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가 먼저 떠오른다. 아카데미를 5개나 받은 걸작영화로 로마제국의 검투사를 소재로 했다. 영화에서처럼 반역자가 검투사가 되기도 했지만 보통 정복당한 나라의 건장한 포로들이나 노예들이 검투사가 됐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검투사는 ‘스파르타쿠스’(? ~ BC 71)일 것이다. 원래 트라키아의 왕족이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며 검투사가 됐다. 그가 일으킨 노예반란은 유럽 정신의 한축을 형성하며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인간이 저지른 전쟁 중 가장 유일한, 합법적이며 위대한 전쟁”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 : 칼리굴라의 작은 아버지가 클라우디우스이고 쿨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이 네로다. 특징이 없었던 클라우디우스 앞뒤로 희대의 제왕 둘이 포진해있다. 칼리굴라는 조선의 연산군처럼 처음엔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패악을 일삼았다. 특히 집단성교 등 음탕함이 지나쳐 암살당했다.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 ‘칼리굴라’(1991)가 도색잡지의 대명사인 ‘펜트하우스’에서 제작된 것도 아이러니컬하다. 네로(AD 37 ~ 68)는 메살리나의 처형 이후 황후가 된 아그리피나의 아들로서 클라우디우스와는 전혀 혈연 관계가 없다. 네로가 황제가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다.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했을 정도다. 그녀 또한 로마를 일부러 불태우는 등 광기에 휩싸인 네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모자지간에 성적 소문이 날 정도로 음란함이 극에 달했다.

▶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 1863~ 1923) - 스페인의 화가로 발렌시아에서 출생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1877년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다. 소로야는 도시와 바다를 주로 그렸는데 현장에서 직접 보고 그린 ‘외광회화’ 방식을 택했다. 빛의 효과를 잘 이용한 현장감과 부드러운 터치가 그의 화풍의 주요 요소다. 마드리드를 주거주지로 스페인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1920년에 발작으로 인한 마비를 겪은 소로야는 회복하지 못한 채 1923년에 사망했다. rainbow@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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