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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수들이 10일 모로코전에서 실점한 뒤 힘 없이 서 있다. 제공 | 대한축구협회

[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2002년 6월14일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 한국이 2002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포르투갈을 누르고 사상 첫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격려 방문을 위해 라커룸을 찾았다. 이 때 주장 홍명보가 김 전 대통령에게 “2006 독일 월드컵을 대비하기 위해 병역 미필 선수들의 군복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건의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축구 발전을 위해 중대한 사안인 만큼 돕겠다”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고 실제 미필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이 주어졌다.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이천수, 차두리 등 자유의 날개를 단 선수들이 곧장 유럽 무대를 노크했다. 이들은 착실히 성장해 개인의 영광도 이뤘지만 국가의 은혜에도 보답했다. 독일 월드컵에서의 원정 첫 승,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원정 첫 16강 진출 등이 연쇄적으로 이뤄졌다.

10년이 지나 이들이 은퇴를 준비할 때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한 또 다른 토대가 두 번이나 더 마련됐다. 23세 이하 선수들이 출전할 수 있는 2012 런던 올림픽과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각각 동메달과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법에 따라 이들의 병역 문제가 해결됐고 2012년 18명, 2014년 23명 등 무려 41명의 선수들이 입대에 대한 고민 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한국 축구에도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 가깝게는 2014 브라질 월드컵부터 멀게는 2018 러시아 월드컵, 2022 카타르 월드컵까지 한국 축구의 새 전성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런던 올림픽이 끝난 지 5년, 인천 아시안게임이 끝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한국 축구의 모습은 어떤가. 11일 끝난 모로코전, 더 정확히 말하면 모로코 2군과의 A매치를 보고 나니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흘 전 러시아와 평가전에선 그나마 봐줄 구석이 있었지만 모로코전은 완전 ‘꽝’이었다. 정신력, 전술, 감독, 환경 타령을 할 게 아니었다. 선수들의 기본기는 혀를 찰 정도였고 축구를 대하는 자세도 낙제점이었다. 한마디로 실력이 없었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모로코의 어린 선수들은 감독 눈에 들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어다니며 과감하게 한국 선수들을 돌파한 반면 ‘신태용호’ 선수들의 플레이는 ‘정말 이 정도 밖에 안 되나’란 소리가 나올 만큼 실망스러웠다.

모로코전 선발 멤버 가운데 무려 7명이 2012년 이후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들이다. 엔트리 전체로 확대하면 절반 이상인 13명이나 된다. 국가에서 국제대회 좋은 성적을 ‘한 번’ 냈으니 앞으론 푹 쉬라고 군 문제를 해결해준 게 아닐 것이다. 홍명보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얘기했던 것처럼, 월드컵 같은 국제대회에서 큰 일을 해달라는 대의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모로코전을 보니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 기성용, 구자철 등 해외에서 부지런히 뛰면서도 태극마크를 위해 헌신하는 선수들이 있지만 다수의 병역 혜택 선수들에겐 ‘국가의 큰 선물’이 많은 돈을 받고 해외 무대에 진출해 개인의 영달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때보다 기량이 떨어졌고 화이팅도 사라졌다. 필자는 논란이 됐던 ‘중국화’는 분명히 있다고 보는데 이런 기량을 펼치고도 “중국화 편견은 억울하다”고 해야하는지 축구계가 되돌아봐야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혜택을 철회하고 싶은 게 많은 이들의 솔직한 생각일 것이다. 선수들은 국가대표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 이번이 마지막이란 각오로 심기일전하길 바란다. 기술위원회나 코칭스태프는 좋은 성적, 해외파, 이름 있는 선수 등에 얽매이지 말고 누가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고 기량이 발전하는 선수인지를 백지상태에서 재점검해야 한다.

축구팀장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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