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2002)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2002 한·일 월드컵 3~4위전 한국-터키전 뒤 한국 대표팀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다. 대구 | 이주상기자

[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을 이끈 명장이다. 그런 그의 복귀설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우선 지금 한국에 오겠다는 생각 자체가 졸렬하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다시 맡을 의향이 있었다면 지난 6월 울리 슈틸리케 전 대표팀 감독이 사임하고 신태용 현 감독이 부임하기까지의 2~3주 기간이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히딩크 같은 명장이 본선에 못 가는 팀을 어떻게 맡겠는가란 의견을 한국인 에이전트가 제기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야말로 더 졸렬하다. 히딩크 감독은 2005년 말 우루과이와 독일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앞둔 호주 대표팀을 맡아 승부차기 끝에 승리를 이끌어낸 적이 있다. 그 때처럼 이란 및 우즈베키스탄과의 2연전을 앞둔 한국에서 도전해 성공하는 게 그나마 이치에 맞는 일이다. 모든 일엔 명분과 타이밍이 필요하다. 이런 식은 아니다.

두 번째론 그의 지도력이 한 물 가도 너무 오래 갔다. ‘히딩크 매직’이 마지막으로 통했던 때가 러시아를 이끌고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4강에 오른 것이었다. 그는 이후 러시아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행 실패로 자존심을 구기더니 터키 대표팀 감독으로 이동해 2012년 유럽선수권 본선을 노렸으나 역시 실패했다. 터키 축구계가 “히딩크에 속았다”며 땅을 칠 정도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3위에 빛나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순식간에 말아먹은 것은 화룡점정이었다. 네덜란드는 체코, 아이슬란드(2연패), 터키에 계속 패하는 수모를 당했고 53개국 중 무려 23팀에 주어지는 유럽선수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히딩크는 부임 1년 만에 쫓겨났다. 지난해 첼시 감독대행으로 와서 5개월 머무른 것은 그야말로 관리자에 불과했다. 한국에 와서 성공할지 매우 불투명하다.

지금은 대표팀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올인’하는 시대도 아니다. 물론 이란전 앞두고 조기소집을 할 만큼 월드컵에 대한 중요성은 여전히 크지만 모든 일에는 질서가 있다. 그러나 ‘4강 신화’를 등에 업은 히딩크가 오는 순간 그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 한국 축구계가 쌓아온 패러다임와 생태계가 파괴될 것이다. 파괴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축구계가 대표팀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할 상황도 아니다. 대표팀이 한국 축구의 전부도 아니다.

거스 히딩크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이 2002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승리를 이끈 뒤 관중에게 화답하고 있다. 광주 | 강영조기자

히딩크 복귀설이 등장했을 때 처음엔 웃었다. 그런데 몇몇 언론이 거들고 그의 영입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생각이 바뀌게 됐다. 물론 히딩크 영입에 찬성한다는 것은 아니다. ‘히딩크를 다시 데려오라’는 생각이 수소탄급 위력으로 국민들에게 먹힐 만큼 한국 축구와 대표팀의 신뢰가 땅에 완전히 쳐박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딩크 재영입론’의 교훈은 거기에 있다.

대표팀은 최종예선 10경기 중 딱 4번을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가게 됐다. 대부분 국민들이 “10경기 중 마음에 드는 경기가 하나도 없다”고 아우성 치고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재미와 감동을 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뜻이다. 비기거나 지면 화가 난다. 이겨도 감흥이 없는 무색무취 승리가 다반사다. “어떻게 경기마다 감동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지금 한국 축구엔 항상 국민들을 설레게 했던 기대감마저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 대표팀이니까 응원하고 박수쳐달라’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여기에 대한축구협회나 대표팀은 국민적 감정과 동떨어진 언행으로 구설수에 휘말려 가뜩이나 불편한 팬들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이 우즈베키스탄전 졸전에도 러시아행을 자축하고 있을 때, 이란에선 시리아 축구대표팀이 전세계에 큰 감동을 선물했다. 시리아는 1800만 국민이 정부군파와 반군파로 나뉘었고 IS까지 나타나 온 나라가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란전 앞두고 시리아 국민들은 광장에 모여 한국의 2002년처럼 자국 대표팀을 응원하고 길거리 행진을 벌였다. 영국 언론은 “시리아인들이 이란전 무승부 뒤 함께 뭉쳐 춤을 췄다”고 대서특필했다. 반군을 지지했던 주전 공격수들이 속속 대표팀으로 돌아와 혼이 담긴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월드컵 플레이오프에 오른 것으로도 내전 중인 나라가 들썩였다. 2014년 알제리, 2016년 아이슬란드에 전세계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도 간절하게 뛰는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사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예전 한국 축구에 다 녹아있던 모습들이다.

본선 갔다고 안도할 때가 아니다. 그걸 몰라준다고 억울해 할 때도 아니다. 실력은 추락했고, 신뢰는 더 추락했다. 비행기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진 몇 장으로 가려질 것이 아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부터 ‘히딩크 현상’을 천천히 곱씹어야 할 때다. 한국 축구엔 아직 9개월의 시간이 남았다. 그 기간에 바뀌지 않으면 히딩크의 그늘이 대표팀을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축구팀장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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