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가격 기와집 한 채 값 …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백성 ‘한’ 닮아


[스포츠서울 왕진오기자] “어느 날 시청 앞에 있던 골동품 가게 우고당에 진열된 특이한 백자 병 하나가 금속유물 전문가 차명호의 눈에 띄게 됐다. 가격을 흥정하자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원을 불렀고, 결국 차명호에게 넘어오지 못하고 마땅한 임자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다 훗날 삼성에 인수됐다.” 이종선 전 삼성미술관 호암미술관 부관장이 최근 발간한 자신의 저서 '리 컬렉션'에서 이건희 삼성회장 소유의 ‘청화백자죽문각병’을 소개하며 밝힌 내용이다.

▲국보 제258호 ‘청화백자죽문각병’.(사진=문화재청)

‘청화백자죽문각병’은 여기저기로 정처 없이 떠돌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과 맞닿아 있다. 나라 잃은 백성을 닮은 듯, ‘청화백자죽문각병’도 1935년 당시는 ‘백자’란 이유로 수집가를 비롯한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고려의 청자가 폭발적인 관심을 받던 것과 대조적이다. 청자의 인기는 대단해서 시장에 나오는 그 순간 곧 바로 1922년 일본인 고미술상들이 만든 경매구락부를 통해 일본으로 팔려나갔다.


정처 없는 방랑을 마치고 주인을 찾은 백자 항아리, 그 ‘청화백자죽문각병’은 마침내 1991년 1월 25일 국보 제258호로 지정됐다.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이 관리를 하고 있다.


'청화백자죽문각병'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백자로 몸통 전체를 모깎이 방법을 사용해 8각의 모를 이룬 병으로, 높이 41cm, 입 지름 8cm, 굽 지름 12cm이다.


길게 뻗은 목과 도톰한 아가리, 둥근 몸통과 높고 넓은 굽이 있다. 문양은 밝은 청화 안료를 사용해 몸통 아랫부분에 선을 두르고, 대칭되는 양 면 중 한쪽 면에 조그만 대나무 한 그루가 다른 면에는 여러 그루의 대나무가 밀집해 있는 모습을 간결한 붓질로 묘사했다.


▲국보 제258호 ‘청화백자죽문각병’ 뒷면.(사진=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조선의 청화백자는 중국의 청화와는 다른 멋과 분위기를 풍긴다. 조선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태도가 도자기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이 백자각병은 그런 취향이 그대로 발휘된 명품이다.


문양은 밝은 청화안료로 몸 아랫도리에 먼저 한 줄의 선을 둘러 지문(地文)으로 삼고, 대칭되는 앞뒷면에 한쪽에는 자그마한 대나무를 한 그루만 그리고, 다른 면에는 여러 그루의 대나무가 밀집해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몰골법(沒骨法,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직접 대상을 그리는 화법)의 간결하면서 담백(淡白)한 붓질로 소략하면서도 기품 있게 묘사됐다.


유약(釉藥)은 약간 담청색(淡靑色)을 띠었지만 거의 순백에 가까우며, 잘 정련된 깨끗한 태토(胎土)가 곱게 드러나고, 굽다리 측면에는 뜻을 알 수 없는 ‘井’이라는 음각의 명문이 있고, 접지 면에는 모래받침 흔적이 남아 있다.


▲국보 제258호 ‘청화백자죽문각병’ 굽다리안쪽 명문.(사진=문화재청)


깨끗하고 준수한 병모양이나 모깎기 수법, 간결하면서도 품위 있는 청화문양, 그리고 거의 투명에 가까운 백자유 등으로 보아 18세기 전반 영조 연간에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金沙里)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도자미(陶磁美)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18세기 전반경의 청화백자 가운데에서도 기형이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면서 간담(簡淡)한 청화 죽문(竹文)은 당시 선비들의 격조와 기개를 담고 있어 단연 이 무렵의 대표적인 백자 병으로 손꼽힌다.


wangpd@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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