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남
박규남 성남일화 사장이 지난 4일 스포츠서울과 인터뷰 도중 구단의 화려했던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구단의 운명이 걸린 며칠 동안 박 사장과 인터뷰는 두차례 연기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박규남(77) 성남일화 사장과의 만남처럼 인터뷰 전 고민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지난달 중순 인터뷰 요청에 응해 30일 만나자고 했던 박 사장은 축구단의 운명이 걸린 긴박한 사정을 들어 일정 변경을 요청했다. 지난 2일로 연기됐던 인터뷰는 다시 4일로 미뤄졌다.
그동안 성남일화 구단을 둘러싼 상황은 복잡했다. 뚝 잘라서 정리하면 이렇다.
지난해 9월 3일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 전 총재의 타계를 전후해 통일교가 축구단을 정리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올해 들어 구단 매각(이후 기부를 통한 시민구단화로 입장 변경) 논의가 본격화됐다. 최우선 협상 파트너였던 성남시와 논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7월 안산시가 새 연고지 후보로 떠올랐다. 안산시와 물밑 논의를 축구계가 주시하던 8월 일부 매체가 협상내용을 보도했다. 9월말까지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던 안산시가 일주일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가운데 ‘성남 잔류’를 요구하는 팬과 축구계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성남시의 움직임이 긴박해졌고 지난 2일 이재명 시장이 ‘일화 축구단을 성남시민구단 형태로 재창단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지난 4일 오후 성남시 탄천로의 성남일화 사장실에서 박 사장과 마주 앉았을 때는 구단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나온 이틀 뒤였다.
대화의 주제도 달라졌다. 치열한 협상 와중에는 축구단의 존속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했지만 성남시의 입장이 정리된 뒤에는 일화 축구단의 24년 역사의 속살, 그 긴 시간 동안 구단의 핵심이었던 박 사장의 소회가 궁금해졌다. 대화의 밀도를 높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질문서를 미리 보내 답변 자료를 준비하도록 했던 인터뷰 관행도 바꿨다. 편안하게 대화한 뒤 기자가 ‘알아서’ 정리를 하기로 했다.
박 사장은 1989년 일화 축구단 창단 당시 부단장으로 시작해 단장과 사장으로 축구단 운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안기헌 대한축구협회 전무, 한웅수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 안종복 경남FC 사장 등 축구단과 협회, 연맹을 오가며 오래 축구와 관련을 맺은 현역 행정가들은 있지만 박 사장처럼 한 구단에서만 24년간 일한 사람은 없다. 재직 기간이 길고 책임이 막중해지면 영광만큼 비판도 받게 된다. K리그 클럽 사상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를 안은 박 사장도 특히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축구계의 ‘문제적 인물’이다.

-먼저 일화 축구단의 창단 과정부터 간추려 주시지요.
공식기록은 1986년 통일그룹이 프로축구단 창단 계획을 세우고 1988년 9월 당시 대한축구협회 산하 기구였던 한국프로축구위윈회(한국프로축구연맹의 전신)의 승인을 거쳐 1989년 3월 18일 워커힐에서 서울 강북지역을 연고로 하는 제6구단으로 출범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축구단에 대한 ‘어른(문선명 전 통일교 총재)’의 의지는 이보다 13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제가 (통일교)부산교구장을 하던 1975년 한 회의에서 어른이 축구단 창단 구상을 밝혔는데 당시 단장 후보가 7명 올라왔어요. 당초 제 이름은 없었는데 어른이 “박판남(박 사장의 개명 전 이름)이 단장을 잘 할 것”이라고 하셨죠. 잊고 있었는데 13년이 지난 1988년 남원에서 지리산연수원 건설 책임을 맡고 있던 저를 불러 축구단을 맡으라고 해 깜짝 놀랐습니다. 사무실에 가 보니 이미 일화라는 구단 이름을 비롯해 감독(박종환 전 감독) 선임 등 창단 준비를 다 해 놓았더군요.
기독교 신자였던 최순영 축구협회장 시절부터 창단 의사를 밝혔지만 거부당했고, 호남 연고 계획이 무산된 것도 알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입니다.

박규남
박규남 사장이 1989년 성남일화 구단의 창단에 얽힌 비화를 설명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 사장은 이후 창단 이후 24년간 구단 운영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창단 때부터 종교가 문제가 됐군요.
축구단 창단에 선교 목적이 있었던 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어른의 애정도 매우 강했습니다. 지난 24년간 통일교가 일화 축구단과 그 연장인 피스컵, 피스퀸컵 등 축구에 쏟아부은 돈이 3000억원이나 되지만 축구단을 운영하면서 종교색을 띄지 않았습니다. 선수단과 프런트 구성도 마찬가지였어요. 기독교도인 우리 선수가 기도 골 뒤풀이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고요. 어른은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인 입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깊이 공감했고, 피스컵 창설에서 보이듯 사회적 공기인 축구를 통해 세계 평화를 달성한다는 큰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창단 뒤 프로축구의 ‘신화시대’로 불리는 ‘동대문시대’를 거쳐 1996년엔 천안으로 연고를 옮겼고, 2000년엔 성남을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서울에 자리잡은 뒤 1990년에는 충청도 연고의 럭키금성(이후 안양LG~FC서울)이, 1991년엔 인천과 경기도를 연고로 하던 유공(부천유공~부천SK~제주 유나이티드)이 들어와 ‘동대문시대’가 199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프로연맹의 지역축구 활성화 방침에 따라 우리는 선문대가 있는 천안으로 옮겼죠. 당시 천안 오룡경기장에는 야간조명시설이 없었습니다. 낮 경기를 했는데 경기 도중 갑자기 비가 오고 어두워져 경기가 중단됐고, 추첨 끝에 우리가 승자가 되는 웃지 못할 일도 겪었습니다. 연고지를 또 옮길 수밖에 없었죠. 강릉과 대구가 유치 의사를 밝혔지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성남이 새 둥지가 됐습니다.
우리가 K리그 7회, 아시아클럽선수권대회 2회 우승을 비롯해 지금까지 모두 24차례 정상에 올랐는데 동대문과 천안을 합쳐 10회, 성남에서 14회 우승컵을 안았습니다. 우리에게 성남의 의미는 이런 객관적인 기록만큼이나 각별합니다.
-거쳐간 스타로도 일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구단입니다. 이런 구단을 어떻게 내놓게 됐나요.
어른 타계 뒤 재정압박이 컸던 것 같습니다. 매각 얘기도 나왔지만 ‘어른이 있었으면 결코 매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4년간 한국축구에 큰 기여를 한 일화 구단의 역사와 전통을 이으려면 기증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지난해 말 논의과정에서, 현대그룹이 2003년 정몽헌 전 회장 타계 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3년 이상 프로야구단 현대 유니콘스를 지원했던 사례를 보면서, 통일그룹도 3년간 축구단을 지원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저는 이 3년 동안 구단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당시 정몽규 프로연맹 총재(현 축구협회장)의 양해를 얻어 부산에서 젊은 지도자로 좋을 길을 가고 있던 안익수 감독을 3년 계약을 해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빨리 악화됐습니다. 안 감독에게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동안 경기장 안팎에서 수많은 선수들을 관찰하셨는데요. 일화를 거쳐간 선수 중 베스트11을 꼽아 주시지요.
골키퍼로는 사리체프(후일 귀화명 신의손)가, 수비수로는 안익수 박광현 방인웅 이종화가, 미드필더로는 이상윤 신태용 김이주 이기범이, 포워드로는 김도훈과 고정운이 떠오릅니다. 황연석 박남열 이태홍 김대의 김상식 정성룡도 좋은 선수였죠. 외국인으로는 샤샤 모따 몰리나 이따마르 라돈치치의 이름이 생각납니다. 감독 중에서는 박종환 차경복 김학범 신태용 감독이 큰 성취를 이뤘는데 딱 한 사람만 들라면 박종환 감독이 되겠네요.

박규남
박규남 사장이 성남일화 24년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감독과 베스트11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구단이 올해 초 펴낸 ‘성남일화천마프로축구단 24년사’의 연도별 선수 명단을 살펴 보며 고심하며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가장 좋았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2004년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입니다. 11월 24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와 원정경기에서 3-1로 대승해 우승이 눈앞이었는데 12월 1일 홈경기에서 0-5로 대패했어요. 결국 차경복 감독이 사퇴했지요. 가장 기뻤을 때는 2010년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이란의 조바한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3-1로 승리해 6년 전의 아픔을 씻었을 때입니다.
K리그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불리는 1993년 포항과 챔피언 결정전도 잊지 못합니다. 동대문(1-1), 포항(3-3)에서 비긴 뒤 중립지역인 안양에서 벌어진 3차전에서 연장 전반 이상윤의 골든골로 세번째 우승컵을 안았죠.
-일화는 우승컵을 모으는 데만 돈을 썼을 뿐 마케팅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클럽 하우스는 물론 훈련구장 하나 만들지 못해 남은 것은 역사와 기록밖에 없다는 지적도 따갑습니다.
마케팅도, 홍보도 할 줄 모른다는 지적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축구가 아닌 종교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안타까웠습니다. 좋은 선수를 유치해 우승을 하면 관중이 늘어나고 마케팅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 더 성적에 매달린 측면도 있습니다.
2003년 피스컵 창설 때 사무총장을 맡았습니다. 유능한 실무진이 모여 ‘세계적인 팀을 유치해 좋은 경기를 보여주게 됐다’며 자신감을 갖고 대기업을 상대로 후원 유치에 나섰습니다. 상대기업의 실무자들은 다 좋아했지만 고위층으로 결재가 올라가면 무산되곤 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무척 슬프고 서러웠습니다.
성남의 율동공원에 통일그룹 소유 땅이 30만평 있었습니다. 이 중 1만평의 용도가 문화공간이었습니다. 여기에 클럽 하우스를 지으려고 허가를 신청하고 설계도까지 그리는 등 애를 썼지만 결국 무산됐습니다.
시민구단이 되면 더이상 이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화려한 구단의 전통이 있고 분당과 판교에 사는 축구팬의 수준도 높습니다.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한 잠재적인 후원기업도 많습니다.
‘장애가 없었다면 정말 멋지게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결국 그런 난관을 돌파하지 못한 것을 포함해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여건 핑계를 대고 싶지 않습니다.

박규남
박규남 사장이 그토록 성적에 집착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경에 보이는 수많은 우승 트로피는 그에겐 훈장이자 ‘성적에만 매달린 스포츠단 최고 경영자’라는 낙인이기도 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24개의 우승컵을 수확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결이 있었습니까.
돈만 있다고, 좋은 선수와 지도자를 갖췄다고 누구나 우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장과 단장을 비롯한 프런트도 축구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엄정하고 공의로운 자세로 감독과 소통하고, 정성 들여 선수들을 지원할 수 있는 전문가급 식견을 갖춰야 합니다. 흔히들 라커룸과 경기장, 훈련장 안의 상황은 감독에게 맡겨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런트는 선수 수급부터 전술까지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천하의 박종환 감독도 정실로 선수를 기용했다가 연패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심판하고도 언성을 높여야 하고요. 공밥을 먹는 직원이 없도록 행정에서도 빈틈이 없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한 뒤에 얻을 수 있는 꽃이자 열매가 우승입니다. 모난 성격 때문에 저는 팀을 거쳐간 역대 감독에게 인심을 못 얻었습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박 사장께는 알려지지 않은 일화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성남으로 이사오면서 구입한 정자동의 제 소유 집을 아직 한번도 써보지 못했습니다. 14년 동안 수내동, 시흥동, 운종동, 성복동 등에 전셋집을 구해 다섯차례 이사를 했습니다. 우승하면 새 동네로 이사해 다시 그 동네의 기(氣)를 받는 식이었죠.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기도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며 운동장을 일곱바퀴 돌았습니다. 우리 선수와 감독 등 열두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지요. 골문을 잡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24년 동안 아내와 함께 국내는 물론 해외의 경기장과 훈련장까지 따라 다녔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진 것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미신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게는 그만큼 온 마음으로 정성을 쏟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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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남 사장은 인터뷰 도중 여기저기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구단이 처한 비상한 상황을 보여주는 듯 했다. 특히 민감한 구단 직원의 고용승계 문제에 대한 그의 소망은 간곡하고도 진지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성남시가 재창단 의지를 밝혔지만 해결 과제도 많습니다.
성남시가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니 지켜볼 뿐입니다. 일단 ‘성남’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스럽고 고맙습니다. 일화 구단이 키워온 역사와 전통, 기록도 소중히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 역시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 구단이 잘 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민감한 사안이라 조심스럽지만 구단 직원들의 고용승계 문제에도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계약직을 포함해 구단 직원이 모두 22명이었는데 이중 3명이 이미 명예퇴직했습니다. 남은 사람 중 스스로 떠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가능한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통일교 신자는 저를 포함해 3명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평소 구단 업무를 하면서 종교를 앞세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축구단에는 아무나 갖다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종교 이전에 이들의 업무에 대한 전문성, 열정, 사람 됨됨이를 꼭 살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24년에 대한 소회를 들려 주시지요.
24년 전 모든 꿈을 접고 축구단을 맡아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축구밖에 없습니다. 다른 취미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인생을 참 재미없게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힘들 때도 있었고 좋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24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자식들은 “그동안 정말 잘 했다. 이제 다른 것은 욕심 내지 말라”고 합니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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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남 사장이 인터뷰 후 구단이 올해 초 펴낸 ‘성남일화천마프로축구단 24년사’에 사인을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쓴 글. 지면에는 ‘기억해 주세요’라는 문구만 따서 썼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인터뷰 뒤 박 사장에게 올해 초 구단이 펴낸 ‘성남일화천마프로축구단 24년사’에 사인을 부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기억해 주세요. 박규남 증정. 2003.10.4’라는 글자를 또박또박 썼다. 이슬 맺힌 눈으로 말없이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는 베테랑 축구 행정가의 얼굴에 찬란한 빛과 함께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류재규기자 jklyu@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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