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웨스트햄의 홈구장, 불린 그라운드.


[런던=스포츠서울 이성모 통신원] "나는 영원히 비누방울을 불 거야. 하늘에 떠다니는 예쁜 비누방울을."


웨스트햄은 참 묘한, 뭔가 앞뒤가 안 맞아서 더 재밌는 매력이 있는 팀입니다. 팀 앰블럼에 새겨진 '망치'(Hammers), 또는 '철'(Iron)이라는 애칭을 사용하는 그들은 경기 시작 전과 종료 후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영원히 비누방울을 불 거야, 하늘에 떠다니는 예쁜 비누방울을"이라는 가사의 응원가를 부릅니다. 단순히 가사만 예쁜 것이 아니라, 멜로디도 잉글랜드 모든 클럽의 응원가 중 가장 서정적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EH69QlJSY4&feature=youtu.be


영상=첼시 전 종료 직후 응원가를 부르는 웨스트햄 팬들


이날 펼쳐진 웨스트햄 대 첼시의 경기는 아주 전형적으로 선제골이 '팔할'을 좌우하는 경기였습니다. 선제골이 중요한 거야 모든 경기가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양팀의 최근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더욱 자명해집니다.


이달 초 사우스햄튼 전의 패배 이후 이례적으로 구단에서 지지성명을 발표한 첼시는 그 후로 아스톤 빌라는 잡았지만 디나모 키예프 원정에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준 끝에 웨스트햄 원정에 왔습니다. 아스톤 빌라가 현재 EPL 최악의 폼을 보여주는 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진짜 시험대는 웨스트햄전이었습니다.


반대로 웨스트햄은 한마디로 잃을 게 없는, 이미 이번시즌 아스널 맨시티 리버풀을 잡아서 첼시를 두려워할 것도 없는 자신만만한 상태였습니다. 홈팬들의 '비누방울'응원가를 포함한 열광적인 응원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웨스트햄의 선제골이 터졌습니다. 제 양옆에 앉았던 중국, 일본에서 온 기자들이(이후 첼시의 동점골 상황에서 둘 다 'Yes'!를 외친 것을 볼 때 첼시 팬이 분명합니다!) 한숨을 쉬는 가운데 제 눈에 가장 명백하게 다가왔던 것은 이미 전의를 잃은 듯한 첼시 선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경기 속행을 위해 터치라인에 모여드는 첼시 선수들은 대부분이 뒷짐을 지거나 고개를 푹 숙인채 벌써부터 심적으로, 체력적으로 지쳐보였고 누구하나 서로에게 괜찮다고 격려하는 선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2. 선제골 허용 직후 첼시 선수단의 모습.


그런 첼시의 모습은 현재 첼시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첼시는 전형적으로 세트피스가 강하고 수비수들도 언제든 골을 터뜨릴 수 있는 팀입니다. '전성기' 시절이라고 할 것도 없이 지난해 이맘때쯤만 보더라도, 그들은 웨스트햄에 한 골을 먼저 내줬다고 망연자실하던 팀이 아닙니다. 존 테리를 비롯한 선수들이 화이팅을 외치면 그들은 곧바로 추격골을 넣고 곧잘 경기를 뒤집곤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첼시는 후반전에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세트피스를 통해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1-1이 된 상황, 웨스트햄에서는 앤디 캐롤 카드를 꺼냈고, 앤디 캐롤이 경기장에 투입된 순간부터 현장에 있던 제 눈은 캐롤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웨스트햄의 공격상황에서). 선수가 한 명 더 많은 웨스트햄이 캐롤 카드를 꺼낸 순간부터, 그들이 크로스에 이은 캐롤의 포스트 플레이를 노릴 것이라는 건 너무나도 명백한 상황. 결국 웨스트햄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한 방으로 그렇게 첼시를 잡았고, 존 테리-게리 케이힐이라는 주전 센터백 라인이 뛰고 있었던 첼시 입장에선 안타까운 한 방이었습니다.


이날의 홈팀이자, 승자인 웨스트햄은 현장에서 보니 어디 하나 빈틈이 없는 꽉 찬 팀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들에겐 비록 슈퍼스타는 없으나 충성스러운 주장 마크 노블을 비롯해서 전 포지션에 탄탄한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수장인 슬라벤 빌리치 감독 역시 크로아티아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등 경험이 풍부하고 캐릭터가 강한 인물입니다. 경기 내내 "컴온유아이언스(Come on you Irons)"라고 외치는 터프한 홈팬들의 열기는 다른 어떤 구장보다도 뜨거웠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자주 눈에 들어왔던 선수는 등번호 28번의 마누엘 란지니. 최근 빌리치 감독이 '나의 모드리치다'라고 극찬했던 란지니는 중원에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하며 웨스트햄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골라인테크놀로지'확인 끝에 1cm 차이로 노골임이 확인된 그 상황도, 재빠르게 공을 걷어낸 란지니가 아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상황이었습니다.


사진 3. 기자회견에 나타나지 않은 무리뉴 감독.


이날 터치라인에 서 있을 때부터 이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아닌 어딘가 무기력해보이고 심지어 고독해보이까지 했던 무리뉴 감독은 결국 기자회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은 배경에는 단순히 이 경기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최근 현지에서 불거졌던 이야기(무리뉴가 그를 촬영하던 14세 소년을 밀쳤다는 현지보도)에 관해 그가 현지기자들에게 "당신들은 더이상 나에게서 재밌는 헤드라인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부분도 들어있습니다만, 그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기자회견에 나오지 않고, 대신 다른 코치조차 보내지 않은 것은 이미 여러 언론에서 언급했다시피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었습니다.


이미 수차례 FA와 마찰을 빚어온 무리뉴가 이제 현지언론과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미디어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은 감독 커리어 사상 최대 위기에 놓인 그에게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 악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진 4. 승리 후 기뻐하며 돌아가는 웨스트햄 팬들


무리뉴 감독의 기자회견을 기다리다가 얻은 것 없이 돌아오는 길, 홈팀의 승리를 만끽한 웨스트햄의 팬들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업튼 파크 역 바로 옆의 한 펍에서는 또 다시 "비누방울" 응원가가 울려퍼졌습니다. 젊은 20대에서부터 나이가 지긋한 60대의 팬들이 다같이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나는 영원히 비누방울을 불 거야"라는 응원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에 또 한 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날의 경기로 첼시는, 또는 더 구체적으로는 무리뉴 감독은 더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홈팀이자 승자인 웨스트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분명히 앞으로도 EPL의 그 누구든 잡을 수 있는 팀인 동시에 '망치를 들고 비누방울을 터뜨리는' 참으로 매력적인 팀입니다.


글, 사진, 영상. 런던=이성모 통신원 london2015@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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