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포토]김응용
[용인=스포츠서울최재원선임기자]김응룡 전 감독이 21일 경기도 용인 한 식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shine@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김경윤기자]“아이고 무슨 인터뷰야~. 무슨 욕을 또 먹으라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투박한 목소리. 김응룡(74) 감독은 여전했다. 손주뻘 되는 젊은 기자가 수 차례 조르니, 마지 못한 듯 장소와 시간을 알려줬다. “그럼 이리로 와. 할 말은 없어.” 약 1년 만의 김응룡 감독과의 자리는 그렇게 마련됐다. 용인 에버랜드 인근의 한 야외 식당. 김 감독은 그늘에 앉아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여기 공기 좋지? 밥이나 먹자구.” 안부를 채 묻기도 전에 김 감독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먹는 이야기, 일상 생활…. 야구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김 감독은 즐거워 보였다. 그는 “요샌 참 즐거워. 첫 백수 생활 때(삼성 사장 퇴임 이후)는 그렇게 좀이 쑤셨는데 요즘엔 마음이 참 편해”라며 허허 웃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야구계 거장의 모습은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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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스포츠서울최재원선임기자]김응룡 전 감독이 21일 경기도 용인 한 식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낡은 벨트가 눈에 띈다./ shine@sportsseoul.com

◇자연으로 돌아간 김응룡 감독, 그의 두 번째 휴식기

김응룡 감독은 개성중학교 재학 중이던 지난 1954년 이후 60년 이상을 야구장에서 웃고 울었다. 프로에서는 해태에서 18년을 있었고 삼성에서 4년, 그리고 삼성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야구장을 떠나 있던 건 2010년 12월 삼성 사장에서 물러난 뒤 2년이 전부였다. 그는 2013년부터 2년 간 한화에서 지휘봉을 잡은 뒤 인생의 두 번째 공백기를 갖고 있다. 첫 번째 공백의 테마가 ‘기다림’이었다면 두 번째 공백의 주제는 ‘치유’다. 김 감독은 “처음 쉴 때는 너무 힘들었어. 집에서 숨을 쉬기도 힘들더라구. 그런데 지금은 달라”라고 말했다. 기자의 ‘심심하진 않냐’는 질문에 “심심하긴! 어휴~. 몸을 회복하느라 힘쓰고 있는데 아직도 멀었어. 한화 감독 하면서 몸이 굉장히 안 좋아졌는데, 집에서 푹 쉬고 있어. 몸이 완전히 갔어. 앞으로 컨디션을 예전처럼 회복하려면 2~3년은 더 걸릴 것 같아”라며 웃었다.

요즘 김 감독은 농사를 짓는다. 집 인근 텃밭에서 고추, 오이를 키운다. 때때로 도서관도 다니고 있다. 김 감독은 “노인네가 어디 갈 곳이 있겠어? 요즘엔 집 근처 네 군데 도서관을 다니고 있어. 한 군데만 가면 사람들이 알아봐서 창피해. 삼국지, 수호지 같이 고전 소설을 읽으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라고 전했다. 평생을 함께 했던 야구는 정을 떼려 노력 중이다. 김 감독은 “요즘 야구는 전혀 안봐”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따금 “근데 5위는 누가 올라갈 것 같아?”라고 묻는 말엔 지울 수 없는 애정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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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스포츠서울최재원선임기자]김응룡 전 감독이 21일 경기도 용인 한 식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 shine@sportsseoul.com

◇야구인 김응룡, 리틀야구에 푹 빠지다

김응룡 감독은 야구에 대한 목마름을 순수하게 풀고 있었다. 그는 요즘 리틀야구가 열리는 지역 야구장을 찾아 멀찌감치에서 관전하곤 한다. 김 감독은 “그냥 갈 곳도 없고 해서 리틀야구를 보러가. 정말 재밌더라구. 삼성 사장 할 땐 프로야구를 보더라도 5회 이상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난주 일요일 남양주에 가서 리틀야구 3경기를 연달아 봤어. 성질 급한 내가 그 자리에 달라 붙어서 보는데, 나도 신기하더라구”라고 털어놨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 다음날엔 장충야구장에 가서 2경기를 봤는데 좋은 선수가 많더라. 키가 185㎝는 족히 넘어보이던데, 그런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어. 참 흐뭇했어.”

김 감독은 예나 지금나 학생야구에 관심이 많다. 몇 년 전까진 모교 개성고 야구부에 수천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뒤엔 비활동기간마다 사비를 털어 우완 이태양이 제주도에서 자율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그 2년을 통해 이태양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김 감독은 “그 때 여러 선수에게 같이 제주도를 가서 훈련하자고 했었지. 근데 따라오겠다고 하는 선수는 이태양 한 명 뿐이더라구. 그 때 좀 적극적으로 선수들을 데리고 가서 훈련 시켰으면 그 친구들이 많이 성장했을 텐데 싶어. 아쉽지 뭐”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한화 감독 시절의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는 “그 땐 경기 시간이 가까워 지면 가슴이 두근두근 했어. 자꾸 지니까 불안하고 그러더라구. 항상 이기는 야구를 하다가 그렇게 되니까, 지는 입장의 심정을 알겠더라구. 나 2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느꼈어. (김)성근이도 그럴 거야. 안쓰러워”라고 전했다.

◇유니폼을 벗고 40여년 만에 마운드에 오르다

김응룡 감독은 최근 용기를 냈다. 지난 7월 18일 수원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을 찾은 것. 후배 감독들의 공로패 전달 행사에 참석하는 한편, 시구를 했다. 공은 애제자 선동열 전 감독이 받았다. 김 감독의 기억이 맞다면 그가 그라운드에서 공을 던진 건 선수 때 이후 처음이다. 그는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엔 마운드에서 공을 한 번도 던져보지 않았지. 40년 쯤 됐나? 연습을 한 번도 안 했는데 다행히 공이 제대로 날아가더라구. 느낌이 묘했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후배 감독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엇에 대한 미안함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김응룡 감독은 통산 1567승 68무 1300패를 기록해 이 부문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1년에 70승을 거두더라도 22년이 넘는 엄청난 기록이다. 더군다나 김 감독이 첫 지휘봉을 잡았던 1983년엔 프로야구 총 경기 수가 100차례 뿐이었다. 김 감독은 본인의 기록에 대해 “누구든지 깰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류)중일(삼성감독)이는 깰 거 같아. 중일이는 내가 삼성 사장 했을 때, 삼성 출신 코치 중 가장 열심히 하는 지도자였어. 겉으로 보기엔 순해 보여도 참 강하게 선수들을 만들었지. (류)중일이와 (장)효조, 두 친구가 그랬어. 둘이 지금의 삼성을 만든 1등 공신이야”라고 말했다.

[SS포토]김응용 감독
[용인=스포츠서울최재원선임기자]김응룡 전 감독이 21일 경기도 용인 한 식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 shine@sportsseoul.com

◇실향민 김응룡, “마지막 꿈은 고향에 묻히는 것”

야구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마침 한가위를 앞둔 시점이라 김응룡 감독에게 추석 일정을 물었다. 김 감독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집에서 쉬어야지 뭐”라고 전했다. 김응룡 감독은 아내와 자녀 외엔 가족이 없다. 6.25 전쟁 때 어머니와 형, 누나와 여동생 3명을 북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체육계의 유명한 실향민인 김 감독은 수 십 년간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소득을 얻지 못했다. 8.25 남북 합의에 따라 다음달 20일부터 26일 이산가족 상봉이 예정된 가운데, 관련 소식을 묻자 고개를 저었다. 김 감독은 “그동안 별의별 방법으로 가족을 찾으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다 실패했지. 이번에도 전화 한 통 오더라고. 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그런 전화 말이야.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할 때면)매번 기대를 하지. 하지만 이번에도 어림 없을 거야. 북한에서 이산가족 대상자를 고르는데, 우리 가족은 해당이 안되는 것 같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날엔 일부러 약속을 잡았다. 김재하 전 삼성 단장, 선동열 전 감독과 경주 감포에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김 감독은 “빨리 통일이 돼야해. 그 때 고향에 가서 묻혀야지. 그게 마지막 소원이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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