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김경윤기자]“아이고 무슨 인터뷰야~. 무슨 욕을 또 먹으라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투박한 목소리. 김응룡(74) 감독은 여전했다. 손주뻘 되는 젊은 기자가 수 차례 조르니, 마지 못한 듯 장소와 시간을 알려줬다. “그럼 이리로 와. 할 말은 없어.” 약 1년 만의 김응룡 감독과의 자리는 그렇게 마련됐다. 용인 에버랜드 인근의 한 야외 식당. 김 감독은 그늘에 앉아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여기 공기 좋지? 밥이나 먹자구.” 안부를 채 묻기도 전에 김 감독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먹는 이야기, 일상 생활…. 야구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김 감독은 즐거워 보였다. 그는 “요샌 참 즐거워. 첫 백수 생활 때(삼성 사장 퇴임 이후)는 그렇게 좀이 쑤셨는데 요즘엔 마음이 참 편해”라며 허허 웃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야구계 거장의 모습은 신선했다.
|
◇자연으로 돌아간 김응룡 감독, 그의 두 번째 휴식기
김응룡 감독은 개성중학교 재학 중이던 지난 1954년 이후 60년 이상을 야구장에서 웃고 울었다. 프로에서는 해태에서 18년을 있었고 삼성에서 4년, 그리고 삼성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야구장을 떠나 있던 건 2010년 12월 삼성 사장에서 물러난 뒤 2년이 전부였다. 그는 2013년부터 2년 간 한화에서 지휘봉을 잡은 뒤 인생의 두 번째 공백기를 갖고 있다. 첫 번째 공백의 테마가 ‘기다림’이었다면 두 번째 공백의 주제는 ‘치유’다. 김 감독은 “처음 쉴 때는 너무 힘들었어. 집에서 숨을 쉬기도 힘들더라구. 그런데 지금은 달라”라고 말했다. 기자의 ‘심심하진 않냐’는 질문에 “심심하긴! 어휴~. 몸을 회복하느라 힘쓰고 있는데 아직도 멀었어. 한화 감독 하면서 몸이 굉장히 안 좋아졌는데, 집에서 푹 쉬고 있어. 몸이 완전히 갔어. 앞으로 컨디션을 예전처럼 회복하려면 2~3년은 더 걸릴 것 같아”라며 웃었다.
요즘 김 감독은 농사를 짓는다. 집 인근 텃밭에서 고추, 오이를 키운다. 때때로 도서관도 다니고 있다. 김 감독은 “노인네가 어디 갈 곳이 있겠어? 요즘엔 집 근처 네 군데 도서관을 다니고 있어. 한 군데만 가면 사람들이 알아봐서 창피해. 삼국지, 수호지 같이 고전 소설을 읽으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라고 전했다. 평생을 함께 했던 야구는 정을 떼려 노력 중이다. 김 감독은 “요즘 야구는 전혀 안봐”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따금 “근데 5위는 누가 올라갈 것 같아?”라고 묻는 말엔 지울 수 없는 애정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
◇야구인 김응룡, 리틀야구에 푹 빠지다
김응룡 감독은 야구에 대한 목마름을 순수하게 풀고 있었다. 그는 요즘 리틀야구가 열리는 지역 야구장을 찾아 멀찌감치에서 관전하곤 한다. 김 감독은 “그냥 갈 곳도 없고 해서 리틀야구를 보러가. 정말 재밌더라구. 삼성 사장 할 땐 프로야구를 보더라도 5회 이상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난주 일요일 남양주에 가서 리틀야구 3경기를 연달아 봤어. 성질 급한 내가 그 자리에 달라 붙어서 보는데, 나도 신기하더라구”라고 털어놨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 다음날엔 장충야구장에 가서 2경기를 봤는데 좋은 선수가 많더라. 키가 185㎝는 족히 넘어보이던데, 그런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어. 참 흐뭇했어.”
김 감독은 예나 지금나 학생야구에 관심이 많다. 몇 년 전까진 모교 개성고 야구부에 수천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뒤엔 비활동기간마다 사비를 털어 우완 이태양이 제주도에서 자율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그 2년을 통해 이태양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김 감독은 “그 때 여러 선수에게 같이 제주도를 가서 훈련하자고 했었지. 근데 따라오겠다고 하는 선수는 이태양 한 명 뿐이더라구. 그 때 좀 적극적으로 선수들을 데리고 가서 훈련 시켰으면 그 친구들이 많이 성장했을 텐데 싶어. 아쉽지 뭐”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한화 감독 시절의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는 “그 땐 경기 시간이 가까워 지면 가슴이 두근두근 했어. 자꾸 지니까 불안하고 그러더라구. 항상 이기는 야구를 하다가 그렇게 되니까, 지는 입장의 심정을 알겠더라구. 나 2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느꼈어. (김)성근이도 그럴 거야. 안쓰러워”라고 전했다.
◇유니폼을 벗고 40여년 만에 마운드에 오르다김응룡 감독은 최근 용기를 냈다. 지난 7월 18일 수원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을 찾은 것. 후배 감독들의 공로패 전달 행사에 참석하는 한편, 시구를 했다. 공은 애제자 선동열 전 감독이 받았다. 김 감독의 기억이 맞다면 그가 그라운드에서 공을 던진 건 선수 때 이후 처음이다. 그는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엔 마운드에서 공을 한 번도 던져보지 않았지. 40년 쯤 됐나? 연습을 한 번도 안 했는데 다행히 공이 제대로 날아가더라구. 느낌이 묘했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후배 감독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엇에 대한 미안함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김응룡 감독은 통산 1567승 68무 1300패를 기록해 이 부문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1년에 70승을 거두더라도 22년이 넘는 엄청난 기록이다. 더군다나 김 감독이 첫 지휘봉을 잡았던 1983년엔 프로야구 총 경기 수가 100차례 뿐이었다. 김 감독은 본인의 기록에 대해 “누구든지 깰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류)중일(삼성감독)이는 깰 거 같아. 중일이는 내가 삼성 사장 했을 때, 삼성 출신 코치 중 가장 열심히 하는 지도자였어. 겉으로 보기엔 순해 보여도 참 강하게 선수들을 만들었지. (류)중일이와 (장)효조, 두 친구가 그랬어. 둘이 지금의 삼성을 만든 1등 공신이야”라고 말했다.
|
◇실향민 김응룡, “마지막 꿈은 고향에 묻히는 것”
야구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마침 한가위를 앞둔 시점이라 김응룡 감독에게 추석 일정을 물었다. 김 감독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집에서 쉬어야지 뭐”라고 전했다. 김응룡 감독은 아내와 자녀 외엔 가족이 없다. 6.25 전쟁 때 어머니와 형, 누나와 여동생 3명을 북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체육계의 유명한 실향민인 김 감독은 수 십 년간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소득을 얻지 못했다. 8.25 남북 합의에 따라 다음달 20일부터 26일 이산가족 상봉이 예정된 가운데, 관련 소식을 묻자 고개를 저었다. 김 감독은 “그동안 별의별 방법으로 가족을 찾으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다 실패했지. 이번에도 전화 한 통 오더라고. 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그런 전화 말이야.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할 때면)매번 기대를 하지. 하지만 이번에도 어림 없을 거야. 북한에서 이산가족 대상자를 고르는데, 우리 가족은 해당이 안되는 것 같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날엔 일부러 약속을 잡았다. 김재하 전 삼성 단장, 선동열 전 감독과 경주 감포에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김 감독은 “빨리 통일이 돼야해. 그 때 고향에 가서 묻혀야지. 그게 마지막 소원이야”라고 말했다.
bicycle@sportsseoul.com
기사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