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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이 8일 레바논 시돈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레바논전에 앞서 국가연주 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제공 | 대한축구협회

[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독일 출신 울리 슈틸리케(61)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은 이중적인 커리어를 갖고 있는 감독이다.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독일이 준우승하는데 중심 선수로 활약하는 등,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선수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지도자 슈틸리케’로 이동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는 한국대표팀 사령탑을 거친 외국인 감독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경력을 들고 한국에 왔다. 거스 히딩크(1998 프랑스 월드컵 4강)를 필두로 움베르투 코엘류(2000 유럽선수권대회 4강) 요하네스 본프레레(1996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딕 아드보카트(2004 유럽선수권대회 4강) 핌 베어벡(2002 한·일 월드컵 4강 수석코치)까지, 네덜란드나 포르투갈에서 온 전 대표팀 외국인 사령탑들은 한국 축구에 뭔가 하나는 보여줄 수 있는 업적을 쌓고 한국에 왔다. 반면 슈틸리케 감독은 1989년 36살 나이로 스위스 국가대표팀을 맡아 일찌감치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메이저대회 우승이나 상위권 경력은 물론, 참가 기록 자체도 없다. 최근엔 카타르 프로축구 1~2부를 오가는 등 유럽에서도 외면받았다.

슈틸리케 감독 경력은 한국에 오는 순간부터 큰 핸디캡이 됐다. 대중적 인지도가 특히 강조되는 한국 풍토에서 그의 뒤엔 ‘성공한 경험이 없는 3류 감독’ 시각이 엄연히 존재했다. 한국 축구가 원한 외국인 감독상이 맞는가란 의문도 불거졌다. 슈틸리케 감독을 낙점한 이는 한·일 월드컵 앞두고 히딩크 감독을 데려와 4강 신화를 일궈낸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인데,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논란은 초반부터 더 커졌을 수도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히딩크급’으로 격상된 최근에도 ‘그렇게 훌륭한 감독이라면 지금까지 유럽에서 몰라볼 수가 없는데…’란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이젠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마지막 오해와 편견마저도 바꿀 때가 온 것 같다. 그가 한국대표팀 사령탑으로 치른 경기가 어느 덧 20차례다. 지금까지 그는 역대 어느 외국인 감독보다 성공적인 항해를 걷고 있다. 14승3무3패를 기록했고, 그 중 무실점 경기가 75%인 15차례에 이른다. 물론 20경기 중 아시아 국가와 겨룬 적이 17회나 되고,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30위 이내 국가와 싸운 적은 지난 해 10월 코스타리카전(1-3 패) 한 차레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아시아 강호를 자처하면서도 고비 때마다 결정력 부족과 수비 실수, 각종 징크스에 무릎 꿇었던 과거를 돌아보자. 위기를 기회 삼아 정면돌파하고 승리까지 챙긴 ‘슈틸리케 용병술 시리즈’는 그를 더 이상 삐딱한 시선으로 볼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9일 레바논 원정에서 3-0 승리를 챙기며 ‘22년 징크스’를 깨트린 것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실력과 결과 하나로 자신 앞에 놓인 먹구름을 걷어가며, 1년 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참패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한국 축구에 햇살을 비추고 있다. ‘열심히 뛰는 선수라면 누구나 대표팀에 올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멀어졌던 축구팬들을 그라운드로 다시 불러모으고 있다. 최근 러시아 월드컵 2차예선에선 결과 못지 않게 내용까지 완벽한 축구를 일궈냈다. 그야말로 ‘한국 축구 왕의 귀환’ 중심에 서고 있다.

일부 팬들과 네티즌들이 전하는 ‘갓틸리케(갓+슈틸리케)’ 같은 수사는 아직 붙이고 싶지 않다. ‘슈틸리케호’도 언젠가는 위기를 맞을 것이고, 내년 6월 시작하는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어떻게 흘러갈 지도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유럽·남미 강호들과 격돌했을 때 어떤 축구를 할 지도 아직은 알 수가 없다. 결과가 나쁘면 한 순간 추락하는 게 한국대표팀 감독의 운명이다. 다만 그의 1년간 항해에 대해선 박수를 치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슈틸리케 감독 능력에 대한 편견은 이제 지우겠다. 그의 항해를 더 긍정적이면서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겠다.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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