젝 그레인키
LA 다저스 선발투수 잭 그레인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스포츠서울DB)

[스포츠서울 박정욱기자]LA 다저스의 잭 그레인키는 27일(한국시간)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와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해 7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그는 1, 2회를 무실점으로 막아 연속 무실점 행진을 45.2이닝으로 늘린 뒤 3회 무사 1·3루에서 한 점을 내줬다. 6월 18일 텍사스전 7이닝 무실점을 시작으로 지난 20일 워싱턴전 8이닝 무실점까지 6경기에서 43.2이닝을 던져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고, 이날도 2이닝을 실점없이 막았던 무실점 행진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45.2이닝 연속 무실점은 역대 6위의 기록이고, 반발력이 좋은 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1920년 ‘라이브볼 시대’ 이후만 따지면 역대 4위에 해당한다.

그레인키 얘기를 꺼낸 것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의 최근 행보를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25일 뉴욕 메츠전에 선발 등판할 차례였는데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고 전날 선수단을 떠나 뉴욕에서 LA로 날아갔다. 아내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구단은 25일 그레인키를 ‘출산 리스트’(Paternity List)에 올리고 아들의 출산 소식을 알렸다. 이날 다저스 선발투수는 마이너리그에서 승격된 좌완투수 이언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5이닝 1실점하며 시즌 첫 승(1패)이자 빅리그 통산 2승(3패)째를 챙겼다. 그레인키는 7일 만에 선발 등판한 27일 메츠전에서 연속 무실점 행진을 멈췄지만 7이닝 4안타 2실점으로 잘 던지고 0-2로 뒤진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갔다. 타선이 9회초 2-2 동점을 만들면서 패전의 멍에도 벗었다.

국내 프로야구와 비교해 보자. 그레인키 같이 가정이나 가족의 경조사를 마주했을 때 국내 야구의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원정길에 있는 A선수가 아이의 출산을 맞았다고 하자. 취재진과 팬들은 그 선수를 야구장에서 그대로 만날 수 있다. A는 “아이가 보고 싶다. 다음 홈경기 때 아이 얼굴을 보겠다”고 말한다. 수훈선수로 선정된 뒤에는 “새 아이가 복덩이다. (홈런과 승리를) 아이와 고생한 아내에게 바친다”고 헌사를 내놓는다.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그리 나쁜 풍경은 아니지만, A는 새 새명과 산고를 겪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날 날을 미루고 그 날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 매뉴얼과도 같은 수순이다. ‘출산 리스트’와 같은 제도는 없다.

[SS포토] 손아섭 \'잘못 맞았어\'
롯데 손아섭.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여기서 롯데 손아섭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손아섭이 위독한 아버지를 뒤로 하고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지난 14~16일 청주 한화전에 출전하게 된 ‘청주 사태’ 말이다. 그는 청주 원정에 앞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싶다며 ‘휴가’를 요청했는데, 롯데 이종운 감독은 ‘형평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청주에서 유사시 아버지 곁으로 곧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손아섭의 아버지는 전반기를 마치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린 듯 17일 세상을 떠났다. 손아섭은 곁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는 장례를 치른 뒤 후반기가 시작되는 21일 팀에 합류해 울산 NC전에 출장했다. 이에 대해 일부 보도와 팬들은 ‘비인간적인 처사’라며 감독과 구단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손아섭의 부탁말대로 ‘야구 외적인 개인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국 야구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해야겠다. 손아섭 사태는 무엇이 문제일까. 잘못은 없는 것인가. 일단 손아섭의 휴가 요청과 감독의 묵살부터 따져보자. 한국 지도자 가운데 특정 선수의 이 같은 요청을 받아들일 이는 거의 없다. 위독하다는 정황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가족이 아프다’는 것만으로 휴가를 주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 감독의 결정은 ‘잘못’이 아니다. 일반 회사라면 어땠을까. 역시 가족이 아프다고 별도의 휴가를 주는 회사는 없다. 하지만 정기·연월차 휴가를 통해 가족을 간호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선수들은 휴가도 없고, 선택의 폭도 없다. ‘비활동기간에도 훈련해야 한다’는 풍토에서 지도자에게 그런 얘기를 꺼내기조차 힘들다. 부모의 제사에 참석하겠다는 코치에게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나”고 혼낸 감독, 가족의 사망소식에도 ‘귀가 연기’를 주문한 지도자는 바로 우리 곁의 얘기다. 가족의 사망 소식을 전하지 않고 경기 뒤에, 대회 뒤에 뒤늦게 알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족이 먼저 그 같은 요청을 하는 사례도 있다. 이 같은 일화는 ‘미담’으로 포장된다.

한국 지도자들은 흔히 선수들에게 “우리가 소싯적에는…”이라거나 “내가 왕년에는…”이라며 나약한 선수들을 질책하고 열정과 희생, 정신무장, 팀워크 등을 강조한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바뀐 시대의 흐름이나 달라진 시대상의 반영은 없다. 선수들의 생각도, 세상도 모두 바뀌어 가는데 야구판은 계속 정체돼 있는 것은 아닐까. 야구 기술과 과학적 훈련법 등 엄청난 발전과 성장을 이뤄냈지만 야구판의 ‘문화’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삼성 타일러 클로이드는 지난 달 출산 휴가로 미국을 다녀왔다. 이처럼 외국인선수들은 출산, 가족 건강 등의 사유로 고향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한국 선수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선비와 군자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jwp94@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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