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포토]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최재원선임기자 shine@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천재의 삶은 어떨까? 얼마나 행복할까? 바이올린계의 대모 정경화(67)가 자신의 음악 인생과 천재의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지난 세월 동안 의무를 다하느라 쫒기듯 무대에 올랐다면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지금에서야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됐다고 고백했다. 스포츠서울 창간 30주년을 맞아 세계 음악사에 발자취를 깊에 남긴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서울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음악의 국제화에 밑거름 되는 일 보람

정경화는 최근 대관령국제음악제 준비로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언니인 정명화 첼리스트와 공동으로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7월 14일부터 8월 4일까지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 콘서트홀과 뮤직텐트 등에서 열리는 이 음악제에서 예술감독 역할 뿐 아니라 연주까지 한다. 대관령국제음악제를 통해 한국 음악의 세계화에 밑거름이 되는 것이 보람있어 행복하다는 그다.

“나는 평생 연주자로 생활했고 국제 무대를 크게 펼쳤던 사람이기에 국제 페스티벌을 통해 우리 음악을 국제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언니가 플랜 짜는 걸 너무 잘하기 때문에 우리 둘이 다양한 음악가들을 초대해 한국에 자극을 주고 대관령국제음악제를 국제화시켜나가고 있다.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가장 좋은 점은 음악학교가 있다는 것과 초대한 음악인들의 마스터클래스다.”

음악학교를 통해 새로운 영아티스트들이 배출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기쁘다는 정경화는 음악 영재들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밝혔다.

“나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영국에서 21년을 살았기에 유럽 문화를 많이 흡수했다. 지금 한국이 발전해서 대단한 나라가 됐는데 이 힘을 어떻게 계속 성장시킬 수 있나가 관심사다. 지금 이화여대에서 챔버 뮤직 코칭과 카운셀링을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일일이 질문도 받는다. 요즘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시간관리다. 집중력을 키우고 마음과 혼을 쏟으라고 얘기해준다. 음악가에게 실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게 마음 관리다. 자기자신 속에 들어가서 예술성을 발달시킬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SS포토]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음악은 인생이다. 최재원선임기자 shine@sportsseoul.com

◇천재의 삶은 쉽지 않아

정경화는 지난 5월 미국 보스톤 뉴잉글랜드 콘서버토리(NEC)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바이올린 천재로 집중적인 훈련을 받기 시작한 탓에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그는 이번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그 어느 때보다 기뻤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하면서 학교를 많이 빠졌다. 그게 아쉬워서 내 아이들은 하루도 학교를 빠지지 못하게 했다. 그런 내가 박사학위를 받는다니 실감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받은 어떤 상 중에서도 기분 좋은 상이었다.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일생을 천재로 살아온 어려움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초등학생 때 바이올린을 잡기 시작해 천재로 추앙받으면서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해온 삶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음악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좌절했던 날들도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잘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격려 덕분이었다.

“열 여덟살 때였는데 음악이 제대로 안나와서 좌절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셨다. 3개월을 함께 지내시며 ‘그 어느 연주자와 겨뤄도 너는 절대로 실력에서 뒤지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에서 힘을 얻어 다시 시작했고 열 아홉살에 국제콩쿠르에 나가서 1등을 했다.”

[SS포토]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요즘 무대에 오르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최재원선임기자 shine@sportsseoul.com

◇남은 삶은 베푸는 인생으로 살고 싶다

2005년 손가락 부상으로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됐다가 2011년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해 다시 연주하게 된 요즘 그 어느때보다 연주할 때 행복하다는 그다.

“젊을 때는 급히 준비해서 무대에 올라가니까 간이 콩알만해진 적이 많았다. 무대 올라가는 게 싫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내가 준비가 되지 않으면 무대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무대가 편하고 연주를 하고 나면 행복하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감사하다.”

우리 나이로 예순여덟. 나이가 무색하리 만큼 왕성하게 연주를 펼치고 있다. 2013년 15개 아시아 도시 순회 연주는 물론 올해는 일본 5개 도시 순회 연주와 서울 연주를 마쳤다. 내년부터 유럽 순회 연주도 계획했다. 이 기세로 앞으로 일흔까지 연주를 계속할 계획이다.

“일흔까지 연주하고 그 후에는 교육에 전념할 생각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자선이 아닐까? 어머니가 아흔세살에 돌아가셨는데 팔순에도 체력이 대단하셨다. 나도 건강하니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바이올린 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정경화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숨통은 식물이었다. 온갖 꽃과 식물을 가꾸며 심신의 피로를 풀었고 바느질을 하며 휴식하기도 했다. 손가락 부상으로 힘들었을 때는 그림도 그렸다.

“음악은 감정이다. 내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예술가만 행복한 건 아니다. 어느 분야나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금상첨화다.”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경화는

서울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여섯살 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10세에 무대에 올랐고 1960년 12세 때 미국 줄리어드음악원에 입학해 이완 갈리미언에게 사사받았다. 1967년에 카네기 홀에서 열린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핑카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했다. 1970년 런던 교향악단과 함께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하며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줄리아드 스쿨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음악학부 관현악전공 석좌교수,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수상 내역으로 1967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 1위, 1994년 그라모폰상, 1997년 자랑스런 이화인상, 1999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 음악부문, 2011년 제21회 호암상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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