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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한국에서 배우로 살고 싶다. ”
1970~80년대 ‘장동건’으로 통하던 배우 겸 제작자 한지일(68)은 한때 은막의 스타였다. 학사출신(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얼짱-몸짱 배우로 데뷔하자 마자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1969년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해 1970년 김수형 감독의 ‘바람아 구름아’로 데뷔해 ‘경찰관’(1978년)으로 대종상 신인상, 이듬해 ‘물도리동’(1979년)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6년 시카고영화제에서 겟츠평화대상을 받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서 열연했으며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 수상작 ‘아다다’의 남자 주인공,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받은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7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 ‘늦게 만난 여자’, ‘금남의 집’, ‘형사 25시’ 등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90년 한시네마타운을 세워 ‘정사수표’ 시리즈,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 16㎜ 에로비디오를 히트시키며 숱한 화제를 낳았다. 그러나 IMF한파로 100억원이 넘는 재산을 날리고 이혼한 뒤 새 출발을 꿈꾸며 200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트 종업원, 외판원, 택시 기사 등 22개의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기부와 봉사활동을 이어오다 이북도민 고국방문단 시카고 지역 인솔단장으로 7년 9개월만인 지난달 일시 귀국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톱스타에서 제작자로 우뚝 섰다가 사업실패와 이혼으로 모든 게 풍비박산난 채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선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역정을 지나온 그를 최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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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9개월만의 귀국
-오랜만의 귀국이다. 근황은.
이북5도청 초청으로 이북도민 고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지난달 11일부터 4박5일간 열린 국외 이북도민 고국방문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귀국했다. 경기도 양평 세미원에서 방문객들을 안내하고 검표도 하면서 그동안 연락을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내가 주인공으로 10작품에 출연한 이두용 감독님, 초창기 ‘한소룡’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던 내게 한지일이란 이름을 지어주신 임권택 감독님과 통화했고 윤일봉 선생님, 신성일 형, 남궁원 선배님 등 예전에 나를 영화계에 있게 해준 선배님들을 찾아뵈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이 순탄치 않다고 들었다.
돈도 없고 나이들어 미국에 건너간 뒤 22개 직업을 갖고 열심히 살아왔다. 방 한칸짜리 ‘쪽방’에 살며 TV도 없이 지낸다. 직장을 찾아 텍사스, LA, 시카고, 메릴랜드,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미국 전역을 다녔다. 이동거리가 지구 두바퀴 반을 넘을 정도고, 자동차도 1988년형 구형차를 타고 다녔다. 막노동, 운전도 하고, 액세서리 판매, 국내 각 지역 특산물 및 정수기 판매 등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이번 방문길에 탈북어린이학교인 금강학교, 여주 중복장애인 복지시설인 라파엘의 집, 47년간 인연을 이어온 거여동 청암양로원 등을 찾아 봉사도 하고 미국에서 가져온 초콜릿 등을 선물했다.
-현지에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LA 마켓에서 일할 때 ‘영화배우 한지일씨 아니냐’고 손님들이 알아보고 ‘왜 이런 데서 일해요?’라고 물어봐서 충격받고 아니라고 부인하고 ‘케빈 정’이란 이름으로 생활했다. 몇년전 KBS2 ‘여유만만’에 나간 뒤 네이버 검색순위 1위에 올랐고 ‘쪽방 산다’는 기사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후 9개월간 직업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다. 얼굴이 알려지니 ‘당신이 이런 일을 어떻게 하냐’며 나를 더 안써주더라. 시카고에서 어떤 분이 내 소식을 듣고 만나 정수기 판매일을 권유하며 사무실 공간도 내주셨다. 도와주신 분을 생각해 미국에서 처음으로 명함에 영화배우 한지일이란 이름을 썼다. 시카고에 정착해 자리잡은 지 6개월 됐는데 마침 한국정부에서 초청한 고국방문단에 결원이 생겨 기적같이 오랜만에 고국땅을 밟게 됐다.
-미국에는 왜 가게 됐나.
IMF의 여파로 그전에 아내가 무리하게 투자했던 호텔, 건물 등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100억원이 넘는 돈을 날렸다. 이혼까지 한 뒤 양양에서 주유소 아르바이트도 했고 베트남에서 월급쟁이 사장으로 라텍스 사업도 했지만 경쟁사로부터 살인위협을 받아 다시 돌아왔다. 사업도, 가정도 망가진 상태에서 방황하다 새 출발을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됐다.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가셔서 70년대에 미국에 머문 적이 있었다.
◇에로계의 대부? 억울하다
-1996년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비롯해 성인비디오가 잇달아 히트해 ‘에로계의 대부’로 유명하다.
내 이름앞에 ‘에로계의 대부’라는 말이 붙는 게 억울하다. 사실 나는 제작만 했을 뿐 에로비디오에 출연하지도, 감독을 한 적도 없다. 한시네마타운을 처음 설립할 때 가족들이 모여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최란 주연의 슬픈 영화 ‘엄마 울지마’와 가족영화인 ‘태권 일지매와 꼬마특공대’, ‘민들레와 괴짜소년 왕배꼽’ 등을 제작했지만 다 망했다. 그러다 성인영화에 손을 대자 마자 ‘매춘녀의 첫사랑’부터 대박이 나서 성인영화의 제왕이 됐다. 52세의 정순영씨를 비롯해 진도희, 정세희, 엄다혜 등과 해태 야구선수 출신으로 일본 성인영화까지 진출한 신영웅 등을 발굴했다. 에로 영화를 찍으면서도 매니지먼트 스타일로 시작했다.
-각종 흥행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기발한 에로비디오와 노이즈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300편 정도 제작한 것 같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비롯해 ‘젖소부인 열받았네’, 만두 파동때 ‘만두부인 속터졌네’ 등 기발한 제목으로 내놓는 것마다 잘 됐다. 김윤진이 출연한 ‘쉬리’가 흥행에 성공한 뒤 ‘쉬리의 여전사 윤진 킴을 찾아라’를 내놓았는데 김윤진이 신인시절 찍었던 단편영화 ‘윈드시티’ 속 한 장면을 썼다. 성인영화가 아닌 멜로 액션물이었는데 당시 김윤진측이 구체적인 내용을 모른 상태로 소송을 했다. 결국 흐지부지됐지만 김윤진에게 마음에 상처를 줬다면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싶다.
-영화 제작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현대판으로 재해석한 ‘돌아온 젖소부인’을 제작하고 싶다. 투자자가 있으면 좋은 각본으로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요즘 버전으로 탈바꿈시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성인용이 아니라 미성년자인 고교생도 볼 수 있도록 약간의 CG작업을 거쳐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장르를 만들 자신이 있다. 예전처럼 가슴 큰 여배우가 아닌 귀엽고 깜찍한 현대적인 외모의 배우로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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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한 배우, 기부와 봉사는 죽을 때까지
-연기에 대한 꿈은 없나.
사실 내가 영화에만 출연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TV드라마에도 꽤 나왔다. MBC 라디오 인기프로그램인 ‘고백’에 출연해 당시 양인자 선생님이 대본을 써주신 인연으로 양 선생님이 집필한 MBC 드라마 ‘늦게 만난 여자’의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금남의 집’, ‘형사25시’에도 나왔다. SBS ‘코미디펀치펀치’에 이성미와 6개월간 출연했고 SBS ‘단단한 놈’에 특별출연했으며 ‘그 여름의 태풍’에도 잠깐 나왔다. 큰 역할은 자신없지만 작은 역할이라도 배우로 한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
-오래전부터 기부와 봉사활동을 해왔다.
요즘 젊은 연예인들은 인기관리를 위해 기부하지만 나는 69년 모델로 데뷔하면서부터 47년째 꾸준히 기부와 봉사를 해왔다. 71년 서울신문 후원으로 종로 국일관에서 재즈가수 김희정씨와 불우이웃돕기를 한 것도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원룸에 살면서 한달에 1500달러를 벌면 1000달러를 두 군데 나눠서 기부했다. 300달러 정도면 나 혼자서 한달을 살 수 있다. 일자리를 찾아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노인회 등에도 물건을 기증했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도 왜 기부를 하는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일해 내가 번 돈으로 어려운 분들에게 기부하고 봉사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다. 돈으로 봉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 스킨십을 해주는 게 가장 행복한 봉사다. 47년간 봉사를 해왔지만 양로원, 장애인에게만 봉사하는 건 아니다. 미국에서 탈북 어린이들에게 자살방지, 희망과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 역시 우울증이라는 무서운 병을 앓았다가 이겨냈다. 모든 걸 다 잃고 미국에 가서 수십번 자살할 생각을 했던 나같은 사람도 잘 살아가지 않나. 돈도 많이 벌어봤지만 내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자살하지 않고 일할 수 있고, 계속해서 어르신들 등을 찾아뵙고 기부와 봉사를 할 수 있어 마음은 부자다.
-앞으로 계획은.
이번에 오랜만에 한국에 왔는데 다들 너무 환대해주셔서 감사하다. 지하철을 타면 나를 알아봐주고 사인요청도 해 너무 행복하다. 돈이 없어도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일자리만 있다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 연기도 하고 제작도 하면서 사는 게 꿈이다.
조현정대중문화부장 hjcho@sportsseoul.com
◇프로필
▲출생=1947년 12월 17일 황해도
▲가족=2남
▲학력=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사
▲수상=1978년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아시아영화제 최우수남우상, 1989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경력=1989년 비디오 영화제작사 ‘백상프로덕션’ , 1990년 독립프로덕션 ‘한시네마타운’ 설립, 2006년 4월 레이밍 한 실크 대표이사, HCM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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