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김진민 PD는 액션과 스릴러 장르를 인간의 깊은 내면과 엮어 보여주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선 굵은 사극이었던 MBC ‘신돈’(2005), 배우 이준기를 재발견한 ‘개와 늑대의 시간’(2007), 40대 오연서와 20대 이동욱의 치정극 ‘달콤한 인생’(2008) 등을 연출하며 일찌감치 스타PD 반열에 올랐다. ‘인간수업’(2020)으로 넷플릭스가 연착륙하는 데 일조했고, ‘마이네임’(2021)으론 배우 한소희를 키워냈다.

지난 달 26일 공개된 넷플릭스 ‘종말의 바보’는 소행성이 대한민국과 충돌하기 200일 전부터 충돌 직전까지 자신만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군상을 다뤘다.

JTBC ‘밀회’(2014), ‘아내의 자격’(2012), SBS ‘풍문으로 들었소’(2015) 등을 집필한 정성주 작가가 극본을 맡았고, 대세로 떠오른 안은진과 연극판에서 정평이 난 전성우, 심기일전한 김윤혜 등이 출연했다. 비록 유아인의 마약 투약 관련 이슈가 있었지만, 작품적으로는 기대되는 측면이 더 많았다.

베일을 벗은 ‘종말의 바보’에는 가혹한 혹평이 쏟아졌다. 전개는 느렸고 갈등의 과정은 분명치 않으며, 이야기는 복잡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안정적이었지만 집중력을 갖고 보기 어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김 PD는“배경이 디스토피아지만, 장르는 휴먼이다. 디스토피아라면 파국이 일어나고 영웅이 탄생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종말의 바보’는 생존 투쟁을 하지 않는다. 종말 직전에 놓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라며 “앞에 사건이 너무 긴박하면 후반이 심심해질 것이라 판단했다. 밸런스 조절이 어려웠다. ‘재미가 없다’기 보단 다른 재미 같다”고 반박했다.

‘종말의 바보’ 속 인물들은 종말을 앞두고 다양한 선택을 한다. 자식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한국을 탈출하려는 인물도 있고, 엄마와 관계 회복에 집중하는 이도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애정하는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도 있다.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인데, 다들 감정에 휘말려요.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해?’라는 질문이 생길 법 하죠. 평범한 사람들이 극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게 드라마잖아요. ‘종말의 바보’에선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계속 물어봐요. 세경(안은진 분)이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데, 평범한 우리들 중엔 그런 위대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꼭 한 명은 있을 거라 봤어요.”

‘종말의 바보’는 당초 지난해 여름이 오기 전 공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주요 배역을 맡은 유아인이 마약 투약과 연루되면서 무기한 연장됐다. 공개 자체가 불투명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4월 26일 공개가 결정됐다. 출연 배우가 사회적인 이슈에 휘말리는 건 2000년부터 방송밥을 먹은 김 PD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아인이 정성주 작가랑 ‘밀회’를 같이 했잖아요. 작가님 작품을 계속 기다렸대요. 저는 내심 욕심이 있었죠. 안은진과 스파크가 튈 만한 좋은 배우가 필요했는데 유아인이면 고맙죠. 현장에선 정말 많은 일을 해줬어요. 단독 신에선 뛰어난 감정 표현으로 연출의 어려움을 풀어주기도 했고요. 후배 배우들에게 인간적인 조언도 많이 했어요. 연기로서 상대를 자극시키기도 했고요. 그리고 사건이 터졌는데, 작품이 제 손을 떠나더라고요. 감정이 아예 없진 않지만, 그래도 고마움이 더 커요.”

유아인의 역할은 전 세계가 주목할만한 생명공학 연구에 성공한 연구원이자 세경의 남자친구 한윤상이다. 분량이 많진 않지만, 적재적소에 등장해 작품에 감정을 불어넣어야 했다. 사건이 터진 뒤 김 PD는 초반부 분량을 대거 도려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작품에 해가 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대중이 사랑한 배우라서 배신감이 더 큰 것 같아요. 드라마는 대중이 만드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최대한 그것에 응하는 것도 연출자의 태도라 생각해요. 그 다음에 나오는 질책은 제가 감당해야겠죠. 사실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에요. 저희가 정말 죽을 만큼 고생하면서 찍었거든요. 저부터 막내 스태프까지 다 치열했어요. 그래서인지 후회는 없어요.”

‘종말의 바보’는 김 PD에게도 도전이었다. 시나리오는 수 년전부터 방송가를 돌아다녔다. 영상화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가 정 작가의 손을 거쳐 김 PD에게 온 것이다.

“저도 어려웠어요. 고민하다가 속이 미식거리기도 했어요. 잠도 오지 않았죠. 나중엔 이 고민이 행복하더라고요. 은사님께서 ‘이번에 성공했으니까, 다음엔 재미없는 거 해야지’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이제 그 말을 이해하게 됐어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다음 작품에선 아마 더 멋있게 연출하지 않을까 싶네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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