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가수 겸 연출가 김민기의 일대기를 다룬 SBS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이 3부가 3.3% 시청률을 기록하며 5일 막을 내렸다.

앞서 1, 2부작이 대학로에 뿌리를 내린 ‘학전’과 중앙정보부로부터 감시를 받던 김민기를 그려냈다면 3부작은 김민기가 정부 감시를 피해 농촌으로 내려간 상황을 묘사했다. 야학, 어린이집 건립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방송되며 먹먹한 감동을 남겼다.

김민기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김민기는 종적을 감췄다. 조영남은 “죽었다는 소문까지 들었을 정도”라고 당시 엄혹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로는 경기 연천군 미산면에 민간인 통제 구역에서 농사꾼으로 살았다. 한 주민은 “방마다 책이 가득했다”고 그의 집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곳에서 마을주민들과 함께했다. 김민기는 “내 처지가 움직이려고 해도 다 장악이 돼 있다. 벼랑 끝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기관원들이 늘 김민기의 동태를 살폈다. 유신정권이 들어선 1972년, 반독재를 외치던 대학생이 불렀던 ‘아침이슬’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의식도 잃었다. 농부로 천착하며 세상에서 잊힌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김민기는 동네 사람들에게 같이 일하며 모내기하며 일을 배우며 어우러졌다. 김민기는 “하루 24시간이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게 좋았다”고 술회했다. 마을 운동회나 졸업식에 가 사진도 찍어줬다. “착했다”고 공통되게 입을 모았다. 어린이에게는 장구도 가르치며 함께했다.

김민기의 비상한 머리는 농촌에서도 번뜩였다. 직접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유통 판로를 이어주며 농사짓는 이들을 이어줬다.

목동시가지로 변한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야학을 했던 경험도 나왔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인 김민기는 미술을 가르쳤다. 당시 야학엔 낮에 노동을 하고 손이 퉁퉁 분 아이들이 야학을 찾았다.

당시 야학을 함께했던 이인용 전 삼성전자 사장은 “저항의 심볼처럼 되었지만 사실 그가 바란 것은 조금 더 좋은 세상,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라며 “김민기 선배는 그저 그가 만든 노래 ‘상록수’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아침이슬’ 이력 탓에 또 다시 야학에서도 빠져 나와야만 했다.

대신 김민기는 어린이를 위해 유아원 설립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자취를 감춘 그를 보기 위해 티켓이 3000장이나 팔렸다. 300만원이 모였다. 당시 강남 아파트값보다 큰 금액이었다. ‘해송어린이집’을 만들게 됐다. 공공육아 목적으로 최초로 설립된 어린이집이었다. 오전에 50명, 오후 50명을 받았다. 후원금도 모으며 어린이집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왔다.

1987년 민주화를 맞이하면서 김민기도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극단 ‘학전’ 대표로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연, 음악 프로그램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소라의 프로포즈’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도 학전에서 탄생했다.

철저하게 ‘뒷것’을 자처하며 무대 뒤의 삶을 살아온 김민기의 삶을 조명한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이 잔잔한 울림을 주며 막을 내렸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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