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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조선호텔 100주년, 한국 호텔의 역사를 새로 쓰다’
10월10일. 이날부터 한국도 ‘백년 호텔’을 가진 나라가 된다.
호텔은 개방과 근대를 상징한다. 전쟁과 외교가 아니면 이동할 일이 없었던 폐쇄적 중세 사회가 종식되고, 각 지역과 세계에서 외국인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조선에도 호텔이 필요해졌다. 인천에 대불호텔이 지어지고 전국 주요 도시에 ‘호텔’이란 낯선 이름을 가진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된지 이제 100년이 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로부터 같은 자리에 꼬박 100년을 이어온 호텔을 이제 가지게 됐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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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겠지만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페닌슐라 호텔(香港半島酒店)은 조선호텔보다 역사가 약 14년 짧다. 1887년 개관한 싱가포르 래플스호텔(Raffles Hotel), 1890년 개업한 일본 다이코쿠(帝國)호텔, 그보다 앞서 1878년에 지은 일본 하코네의 후지야호텔(富士屋ホテル) 등과 비교해도 비슷한 역사를 자랑한다.
세계 유수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호텔이 있다. 파리에는 다이애너 황태자비가 죽기 직전에 머물렀던 리츠호텔이 있고 뉴욕에는 맨해튼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이 있다.
대표 호텔은 스스로 규모나 시설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다. 호텔의 역사에는 그간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인물들이 스쳐지나며 남겨놓은 사람의 향기가 깃들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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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볼 때 서울은 조선호텔이다. 30여년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부루마불’ 게임에서 사용한 호텔 모형은 바로 조선호텔 건물을 똑같이 본따 만들었을 정도다.
◇1914년 소공동
‘매일신보’는 1914년 10월10일자에서 ‘진선진미한 조센호테루 낙성-본일부터 개업’이란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누구나 어리둥절할 단어 ‘호텔’. 한국에 본격적인 호텔의 역사가 열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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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조선정부철도국은 경부, 경의선 철도를 이용하는 내·외국인 승객들이 중간에 쉬어갈 호텔이 필요하자 주요 역에 호텔 신축을 추진했다. 1912년 부산을 비롯해 경성, 평양, 신의주 등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이중 가장 번성했던 경성에 들어선 호텔이 바로 ‘조센호텔 경성(Chosen Hotel Keij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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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 서양식 호텔로서 당시 서울(경성)의 새로운 중심부였던 소공동 언덕에 터를 잡은 조선호텔은 첨단 유행의 상징이었다. 최초로 선보인 승객용 엘리베이터와 프렌치 레스토랑, 뷔페 등 숱한 ‘한국 최초’의 신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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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기한 수직열차(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하고, 아이스크림을 맛봤으며, 원껏 가져다 먹는 뷔페와 댄스파티 등 서구 문화에 열광했다. 조선호텔은 이런 신문물을 100년전 조선인들에게 보여준 유일한 창구였으며 그야말로 ‘상류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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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텔에 묵어간 투숙객의 명성도 백년의 역사만큼이나 화려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등 한국인 주요 인사와 아이젠아워 미국 전 대통령, 맥아더 장군, 마를린 먼로, 로널드 레이건 미 전 대통령 부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세계적 셀리브리티가 바로 이곳 조선호텔 객실에서 잠이 들었다.
◇2014년 소공동
남대문, 서울역과 가까운 소공동은 경성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1912년에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 들어서고 1914년 조선호텔, 1915년 경성우편국 등이 문을 열었다. 소공동이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조선호텔은 그 중심이 됐다.
그래서 조선호텔은 개관 이후 국빈, 고위관리, 외국 유명인사들이 투숙하는 영빈관 역할을 도맡았다. 뉴욕의 월포드 아스토리아 호텔처럼 외교, 정치, 경제, 사교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조선호텔을 출입하지 못하면 진정한 세도가가 아니었다.
당시 조선호텔의 객실요금은 1박(아메리칸 플랜)에 1인당 6엔(2인 11엔)에 조식이 1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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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발간된 ‘일본의 도시하층(中川淸)’에 따르면 1910년대 도쿄에 거주하는 일본인 공장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월 37엔(조선인은 26엔)이고, 집세가 6엔이었다.
한달 집세를 탈탈 털어야만 겨우 하루 묵어갈 수 있었으니, 서민들로서는 출입 자체가 애초 엄두가 나지않는 가격이다.
호텔 도어맨이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온 조선수력발전 사장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를 문전박대했던 일화도 있다. 화가 난 노구치는 1938년 조선호텔 바로 옆에 지상 8층의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자리)을 짓고 꼭대기 층 집무실에서 조선호텔을 바라보며 맺힌 한을 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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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텔은 문화의 중심 역할도 했다. 약 3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실내악 홀이 마련되어 있었고, 이 무대에서 미샤엘만, 쟈크띠보 등 방한 외국인 예술가들이 공연을 했다.
개관 당시부터 프랑스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팜코트(현 나인스 게이트)를 열며 서구식 문화를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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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한 외관의 조선호텔은 1970년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외화벌이를 위한 ‘관광입국’을 내걸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호텔 재건축을 지시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지하 2층 지상 20층의 위풍당당한 모습, 11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공사비가 투여됐다.
아메리칸에어의 지분 투자를 받았으며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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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미를 강조한 호텔 외관은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즈넉한 전통미의 환구단을 그대로 두고 파격적인 야외수영장을 만들었으며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는 당시의 화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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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렀어도 여전히 조선호텔의 위상은 높았다. 조선호텔 로고가 박힌 묵직한 객실 열쇠만 들고 있으면 호텔 인근의 식당가나 택시를 이용할 때 ‘신용카드’ 역할을 했다. 열쇠만 보여주면 믿고 외상을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개관 90년이 가까운 1995년은 신세계가 웨스틴 지분을 인수하고 조선호텔을 100% 독자 경영하기 시작한 해다. 2000년까지 1000억원을 투자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했다.
조선호텔은 2000년 ASEM(아시아 유럽 정상회의)과 2005년 APEC(아시아 태평양 정상회의)에 이어 2010년 G20 정상회의까지 유치하며 ‘국제 정상회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을 드높였다.
2014년 현재 연간 1200만명의 외국인이 찾고 무려 30여개의 특급호텔이 들어선 대한민국 수도 서울. ‘백년호텔’ 조선호텔은 세계 유력 금융 잡지 인스티튜셔날 인베스터 지가 선정한 ‘세계 100대 베스트 호텔’, 아시아머니, 스마트 트래블러 아시아로부터 ‘서울 최고의 호텔’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로 대한민국 대표 호텔로서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우석기자 demor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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