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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우리들의 블루스’ 영상 갈무리. (왼쪽)농인 배우 이소별, 다운증후군 배우 겸 작가 정은혜.

[스포츠서울 | 황혜정기자] 한국 작품에도 장애인의 ‘당사자성’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기존 장애인 배역을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를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실제 장애인 배우가 자신들의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이하 ‘우블스’)는 청각장애인 농인 배우와 발달장애인 다운증후군 배우를 내세워 시청자에 큰 울림을 줬다. 3살 때 홍역으로 고막 손상을 입어 청력을 상실한 배우 이소별(27)은 해녀 달이(조혜정 분)의 동생 별이 역을 맡았다. 별이는 시장에서 커피차를 운영하며 달이의 일을 돕기도 한다. 이소별은 수어와 대사를 함께 사용하며 연기했다. 기준(백승도 분)과 러브라인도 그려지며 눈길을 끌었다.

태어날 때부터 염색체 이상으로 발달장애의 일종인 다운증후군을 가진 정은혜 작가(32)는 영옥(한지민 분)의 언니 영희 역으로 열연, 시청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남들과 다소 다른 외모, 말투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그로 인해 상처받으며, 때로는 버려지기까지 했던 영희의 아픈 과거사는 정 작가의 몸짓과 어눌한 말투를 통해 고스란히 안방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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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우리들의 블루스’ 영상 갈무리

지난 14회 방송에서는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그려졌다. 영옥이 다운증후군 언니 이영희의 손을 잡고 나타나자 일부 마을 사람들이 “좀 모자란 것 같다”라고 한마디씩 얹었다. 이에 별이는 “모자란 거 아니고 다운증후군”이라며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았다. 두 사람은 ‘장애’라는 공감대로 금세 가까워졌다. 별이가 먼저 “나는 농인”이라며 귀에 착용하고 있는 보청기를 보여주자 영희는 “그럼 우리는 친구네”라며 반가워했다. 두 배우 모두 ‘우블스’ 극본을 쓴 노희경 작가가 직접 출연을 제안했다.

정은혜 작가는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괜찮아 사랑이야’, ‘빠담빠담빠담’ 같은 노작가의 드라마를 즐겨 보곤 했다”면서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다소 당황했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출연 제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블스’ 촬영은 지난해 가을, 제주도에서 진행됐다. 그는 “대사 외우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며 “주변에서 잘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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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영화 ‘코다’ 포스터. 배우 윤여정이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코다’에서 열연한 농인 배우 트로이 코처에게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전달하며 수어로 축하를 표현하고 있다. 로스엔젤레스|AP연합뉴스

한편, 해외에서는 이미 장애인의 당사자성을 반영해 장애인 역을 해당 장애를 가진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지난 3월 미국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간 장애인의 ‘당사자성’을 꾸준히 반영해온 해외 영화 산업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상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코다’(2021)는 농인 부모가 낳은 청인 자녀인 한 소녀가 자신의 노래 재능을 뒤늦게 발견하고 음악대학 오디션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제목인 ‘코다’(CODA)는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건청인을 뜻하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이기도 하다. 극중 농인인 루비의 오빠, 어머니, 아버지의 역을 맡은 배우 다니엘 듀런트, 말리 매트린, 트로이 코처는 모두 실제 농인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열린 미국 배우 조합상(SAG)에서도 대상격인 앙상블상은 ‘코다’팀에게 돌아갔다. 어머니 재키 역으로 출연한 배우이자 농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말리 매트린은 이날 수상소감으로 “이 상은 우리 농인 배우들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처럼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농인 배우는 더 많은 기회를 원한다”라고 전했다.

‘코다’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트로이 코처는 이 영화로 역사를 쓰기도 했다. 그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미국 배우 조합상, 미국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주요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전부 수상한 역사상 최초의 농인 배우가 됐다. 이러한 수상은 최근 마블 ‘이터널스’(2021), ‘콰이어트 플레이스’(2021) 등 농인 캐릭터에 청인 배우가 아닌 농인 배우를 캐스팅하며 당사자성을 반영하려는 할리우드의 변화와 맞물린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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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쳐 작가이자 다운증후군 배우 정은혜가 지난 4일 경기 양평 리버마켓에서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한국농아인협회 정희찬 상임이사는 스포츠서울에 “그동안 국내 농아인 예술계 중흥을 위해 많은 분들께서 노력을 기울여왔다. 제자리에 머무르며 발전이 없는 것 같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렇게 좋은 계기로 농인 예술계가 주목을 받게 되어 매우 기쁘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일들을 계기로 한국 농아인들이 예술, 문화 등을 더욱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고 더 많은 예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소망했다.

또한 “영화 ‘코다’는 주위 농아인 분들에게도 큰 이슈가 되었다. 많은 분들이 영화를 찾아서 관람하였고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하나의 주변 풍경이던 농인 사회가 초점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사회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좋은 감정을 나누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일들이 큰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음에 가슴 벅차다”고 전했다.

장애인 배우 전문 소속사인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차해리 대표도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중세시대에 남자 배우가 여자 역을 하지 않았나. 그 당시 담론은 ‘여자들은 연기를 못하니까’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여자 역을 하던 것이 비장애인이 장애인 역을 하는 게 이것과 다르지 않아보이더라”라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 역을 장애인이 하는 것이 시청자 입장에서도 더 진정성 있게 느껴질 것이라 본다. 우리 사회가 점점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소속 배우들의 반응은 어떨까. 차 대표는 “배우들이 고취되고 있다. ‘우블스’를 본 친구들이 “이거 다 봤냐”, “연기 어땠냐”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라. 연기 연습할 때의 분위기도 더 활기차진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답했다.

차 대표는 “‘우블스’ 때문에 우리 회사로 연락을 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1년 전보다 반응이 좋아졌다”며 “‘우블스’를 쓰신 노희경 작가님이 평상시에도 봉사 활동같은 선한 영향력을 많이 보여주신 걸로 아는데 이처럼 결정권을 가진 분들이 깨어있으면 작품의 캐스팅도 달라지는 것 같고,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는 것 같다”라고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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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일 열린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단독 공연 ‘Pain on All Fronts’ 현장. 이랑의 공연에는 항상 동시 문자 자막이 함께한다. 사진 | 황혜정기자.

차츰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다. 공연장을 찾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통역·자막서비스도 미흡한 실정이다. 일부 인디가수를 주축으로 공연장에 문자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대형 공연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배리어프리버전으로 제작되고 있는 영화도 예산상의 문제로 일년에 몇 편에 불과해 67만8000명의 시·청각장애인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를 뒤늦게 봐야 하거나 아예 보지 못한다.

영국 등 선진국에서 이미 2003년에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제작물의 80% 이상에 자막서비스를 법제화한 것에 비하면 한참 뒤처져 있다. 대한민국은 2007년 장애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히면서 ‘제24조 문화예술활동의 차별금지’ 조항에 따라 장애인의 문화예술활동을 위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장비의 기준, 의무 설치 개수 등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이 정해지지 않아 실효성이 미비한 게 현실이다. 대중문화 콘텐츠 속 장애인의 당사자성 반영을 넘어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차례다.

et1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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