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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현장을 떠난지 이제 7년이 되었고, 어느 덧 내 야구인생은 50년이 넘었다. 내 삶은 누구나 알 수 있듯 야구 외에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길과 선택에 단 한 번도 후회를 하거나 다른 인생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다.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 야구를 시작한 까까머리 중학교부터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 야구인으로서 살아온 내 야구인생에 대해 대부분 대중들은 성공한 삶이라고 판단을 하고 사실 나 스스로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아마추어 시절과 프로야구 선수생활 동안 헐크라는 강렬한 이미지의 별명으로 불리며 그라운드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지도자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 코치까지 하면서 새로운 야구를 접했다. 심지어 시카고 화이트 삭스 시절 대망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우승반지도 간직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야구인이라도 단 10명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한국 프로야구의 감독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야구인생에서 복에 넘치는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어디를 가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환대를 받는 유명인으로의 과분함도 누렸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러한 나의 자만이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보는 깊이와 성찰이 생기며 대중에게 받은 사랑과 관심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서라도 꼭 해야된다는 의무가 온통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 야구다. 내가 잘했고, 잘 할 수 있는 야구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후배들과 사회에 미약하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도 야구 유니폼을 입으면 나 자신도 모르게 힘이 쏟아나고 몸이 막 즐거워진다. 야구를 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조금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야구에 대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재능기부를 하는 동안은 늘 나를 괴롭히던 어깨통증도 신기할 정도로 통증이 없어진다. 또 야구에 입문하는 어린 아이들이 야구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고 하면서 해맑게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선택한 것에 스스로가 대견스럽기까지 느껴질 때도 있다.

지난 7년 동안 대한민국 전국을 돌면서 거의 안 가본 도시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곳으로 다니면서 재능기부를 했다. 주변에서 왜 고생을 사서 하냐?는 걱정스런 시선과 핀잔을 많이 듣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야구인들과 대중, 언론에서 조차도 나의 이러한 행보에 어리둥절해 하며 의구심과 안쓰러움이 교차된 눈빛을 전하곤 했다. 이 무모한 도전은 벌써 7년째 현재 진행형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발품을 팔아가며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심지어 외국을 다니며 야구 재능기부에 힘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아직 기량이 부족하고 전문적인 코칭을 통해 발전 가능성이 있는 후배에게 내가 야구를 하면서 체득한 기술들과 야구철학을 전수해주고 싶었다. 또 하나는 나의 이러한 행보를 직접 보고 경험한 후배선수가 야구선수 생활을 마치고 야구 현장을 떠났을 때 이 험한 길을 기꺼이 같이 동행하고 실천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구선수가 은퇴 이후 만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단지 지도자와 해설자라는 야구계의 불문율을 깨고 싶다.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이며,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뜻을 알아주는 이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기는 하다.

왜 하필 동남아시아인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나 또한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넘친다. 야구에 부적합한 날씨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야구가 경제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동남아시아에서 활성화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경제력이 높고 더 좋은 환경들을 가진 다른 대륙이 아닌 동남아시아에서 야구가 과연 보급이 될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나 또한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도 1904년 갓을 쓰고 뛰는 것이 마치 체면과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동으로 여겨지던 조선에서 YMCA를 통해 야구보급을 했던 필립 질레트 선교사 또한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00여 년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야구보급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시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동남아시아에서 야구 보급을 하고 있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능기부(才能寄附)에서 내가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대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구를 하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그리고 야구를 생전 접해보지 않은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민들을 위해 대가 없이 내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내 놓는 일. 이 일을 야구를 오랫동안 해 온 선배로서 먼저 실천하고 싶었다.

국내 재능기부를 넘어 동남아시아에 야구 전파를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바랄 수 있는 대가가 없는 곳이며, 야구 저변이 가장 낮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륙과 비교해 한국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과 비슷한 문화와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야구가 전혀 보급되지 않은 이 불모지에 대한 내 도전정신의 발화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야구를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한 세대뿐만 아니라 오랫 동안 야구를 통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라오스와 베트남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인도차이나 반도 젊은이들에게 야구를 통해 희생, 배려, 협동, 인내 그리고 예의 및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 나 또한 어린시절에 야구를 통해 먼 미래를 위해 꿈을 갖게 되었고 비젼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kenn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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