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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1776년(정조 즉위년)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1722~1777)는 장전(臟錢:부정한 돈) 4만냥, 조(租) 2500석, 송목(松木) 260주(株)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 해 아들 홍상범(?~1777)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홍인한 등 노론 벽파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이찬(1759~1778)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다.

이에 홍상범은 국왕을 호위하는 호위군관 강용휘를, 강용휘는 천민출신 장사꾼 전흥문을 각각 포섭했다. 강용휘로 하여금 20명의 군사를 동원하도록 하였으며, 강용휘의 조카인 궁중별감 강계창과, 강용휘의 딸인 궁인 강월혜도 모의에 가담시켰다. 여러 사람을 포섭한 홍상범은 회합을 갖고 거사 날짜를 정하고, 행동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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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세손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편지. 출처|연합뉴스

◇정조 암살 대가는 상평통보 15냥과 여자 노비 1명

1777년 (정조 1) 7월 28일, 한 여름 삼복 오후. 세 명의 건장한 사내가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앞 도구가(屠拘家:보신탕 집)에 들어갔다. 호위군관 강용휘가 단골로 이용하는 곳으로 강용휘, 전흥문, 홍상범 이들 셋은 보신탕 값으로 3푼을 계산하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강계창과 강월혜의 안내를 받은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장을 한 채 건물 지붕을 타고 정조의 침전인 경희궁 존현각 지붕 위까지 잠입하였다. 이들을 사주한 홍상범은 장사 50명과 함께 대궐 밑에 잠복하고 있었다. 강용휘와 전흥문은 지붕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잠든 정조를 살해하는 게 그들의 최종목표였다. 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정조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하고, 호위내관들을 불렀지만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흩어져 따로 도망쳤다.

전흥문은 근처의 풀밭으로 숨어들었고, 강용휘는 금천교 쪽으로 도망쳤다. 그날 밤 정조의 암살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자객들을 잡기 위해 엿새 동안 도성문을 닫고 수색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이후 경희궁이 경호에 취약하다고 판단한 정조는 8월 6일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777년(정조 1) 8월 11일 밤, 전흥문은 단독으로 창덕궁 침투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을 통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궁궐로 통하는 모든 문의 경호가 강화됐기 때문이었다. 전흥문은 할 수 없이 창덕궁의 서문인 경추문의 담장을 넘다가 궁궐을 지키는 군사인 수포군에게 체포되었다.

전흥문이 체포되자 정조는 심야에 친국을 명령했다. 장소는 창덕궁의 숙장문(肅章門)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전흥문은 강용휘로부터 왕을 시해하는 청부 살인 대가로 상평통보 1500문(15냥)과 여자 노비 1명을 아내로 받는 조건으로 호위군관 강용휘와 함께 경희궁 존현각을 침입한 것이라고 자백했다.

정조 시해 미수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정유역변은 궁성 호위무관과 나인까지 포섭해 진행됐지만 실패했다. 더구나 강용휘는 국왕을 시해하기 위해 자신의 소속 호위청 무사 50여 명을 함께 데리고 갔었다고 실토했다. 국왕을 호위하는 군관이 국왕을 직접 죽이러 자객과 함께 임금의 침전에 접근한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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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70호 장용영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도.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

당시 중앙군사제도의 핵심은 수도 방어를 맡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과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총융청, 수어청 등 오군영이었다. 하지만 노론이 오군영을 장악한 탓에 왕권을 위협했고, 역모사건도 잇달았다. 즉위 후 정조는 군제개혁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세손시절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위협속에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에게 임금의 자리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놓은 것처럼 위태로왔다. 왕을 더 이상 왕으로 여기지 않았던 노론들의 나라 조선에서 정조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호위군관의 역모에 충격을 받은 정조는 자신의 호위부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숙위소’라는 호위부대를 새롭게 창설, 역모 사건을 마무리했다. 1785년(정조 9) 7월에는 훈련도감의 최정예 무사들을 선발하여 장용위(壯勇衛)라는 경호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정조는 처음 3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의 규모를 2년 뒤엔 약 200명으로 확대하고 장용청(壯勇廳)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788년(정조 12) 정조는 기존의 오군영을 감싸던 척신들의 불만을 뒤로하고 장용청을 확대 개편해 친위부대 단독 군영인 장용영을 탄생시켰다.

<역사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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