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누구나 가슴속 깊은 안주머니에 ‘사직서’라는 세 글자가 적힌 봉투 하나쯤은 조용히 품고 살아간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쳇바퀴처럼 무한 반복되는 팍팍한 일상,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숨 가쁘게 몰아치는 업무의 연속에서 벗어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은 이 시대 직장인들이 공유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한 판타지일 것이다. 그 발칙하고도 은밀한 상상을 가장 완벽하고 통쾌한 현실로 만들어줄 압도적인 도주마(馬), ‘메르세데스-AMG SL 63 4MATIC+’와 이번 시승을 함께했다.
이 거침없는 일탈의 여정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선곡은 소연의 ‘퇴사할게여’다. 제목부터 꽉 막힌 직장인들의 속을 뻥 뚫어주는 직설적인 노래와, 맹렬한 V8 엔진을 품고 포효하는 럭셔리 로드스터의 만남은 그 어떤 조합보다 짜릿하고 강렬한 해방감을 선사할 모든 채비를 마쳤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찬란한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SL’은 ‘Super Light(초경량)’의 약자다. 1952년 전설적인 모터스포츠카 300 SL로부터 그 위대한 혈통을 시작했다. 하지만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SL은 본연의 날 선 레이싱 DNA보다는 여유롭고 편안하게 장거리를 항해하는 럭셔리 그랜드 투어러(GT)의 상징으로 그 성격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러나 7세대를 맞이한 이번 SL은 이전의 발자취와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벤츠의 일반 모델을 기반으로 성능을 끌어올리던 기존의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해, 고성능 브랜드인 메르세데스-AMG가 아키텍처 단계부터 독자적으로 전체 개발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는 안락하고 부드러운 GT카의 넉넉한 허물을 시원하게 벗어던지고, 날카로운 핸들링과 폭발적인 성능을 앞세운 정통 스포츠카로서의 맹렬한 야성을 완벽하게 부활시켰음을 의미한다.


차량에 다가서면 클래식 로드스터의 관능적인 황금비율을 현대적인 공기역학 설계로 재해석한 외관이 시선을 단번에 압도한다.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뻗은 보닛과 한껏 뒤로 밀려난 탑승 공간, 그리고 툭 잘린 듯 짧은 숏 데크로 이어지는 실루엣은 정지 상태에서도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갈 듯한 팽팽한 역동성을 부여한다. 전면부를 꽉 채우는 14개의 수직 슬랫 파나메리카나 그릴은 AMG의 뚜렷한 핏줄을 증명하며, 매끄럽게 다듬어진 차체 곡선은 우아함과 근육질의 탄탄함을 절묘하게 섞어놓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붕이다. 이전 세대까지 고수하던 무거운 하드톱 대신 무려 21kg이나 가벼워진 Z-폴드 소프트톱을 채택했다. 이는 차체의 무게 중심을 극단적으로 낮추고 날렵한 코너링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AMG의 타협 없는 엔지니어링적 결단이다. 도어를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아날로그의 낭만과 첨단 디지털 기술이 결합한 ‘하이퍼 아날로그’ 감성이 탑승자를 반긴다. 센터페시아 중앙의 11.9인치 세로형 디스플레이는 오픈 에어링 시 강렬한 직사광선으로 인한 화면 반사를 막기 위해 각도를 12도에서 32도까지 전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영리한 디테일을 품었다.



브레이크를 밟고 붉은색 시동 버튼을 누르자, 긴 잠에서 깨어난 4.0리터 V8 바이터보 엔진이 주변의 공기를 뒤흔드는 우렁찬 배기음을 토해낸다. 최고출력 585마력, 최대토크 81.5kg·m라는 가공할 제원은 서류상의 무미건조한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드라이브 모드를 ‘스포츠 플러스(Sport+)’로 돌리는 순간 하체는 팽팽하게 조여지고, 스로틀 반응은 신경질적으로 변하며 언제든 노면을 박차고 나갈 준비를 마친다. 가속 페달에 발을 얹자마자 터져 나오는 맹렬한 동력은 1950kg에 달하는 묵직한 차체를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단 3.6초 만에 쏘아 올린다. 터보랙을 체감할 새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토크는 일상의 묵은 스트레스를 순식간에 룸미러 뒤편의 아득한 점으로 날려버린다.


직선 도로에서의 호쾌함도 일품이지만, 코너링에서의 움직임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SL 라인업 최초로 적용된 사륜구동 시스템 ‘4MATIC+’와 최대 2.5도의 조향각을 지원하는 리어 액슬 스티어링의 완벽한 조화는 거대한 차체를 콤팩트 해치백처럼 예리하게 회전시킨다. 유압식 안티 롤 바가 포함된 ‘AMG 액티브 라이드 컨트롤’ 서스펜션은 좌우 롤링을 극도로 억제하며 바닥을 끈적하게 움켜쥔다.
소프트톱을 활짝 열어젖히고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탁 트인 외곽 도로로 스며든다.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헝클어뜨리는 산바람 사이로, 11개의 스피커를 품은 부메스터 서라운드 시스템을 통해 오늘의 선곡 ‘퇴사할게요’가 쏟아져 나온다.



“퇴사할게요, 아쉬울 것도 없거든요”라고 외치는 솔직하고 발칙한 가사가 귓가를 때릴 때, 엔진은 마치 코러스를 넣듯 날 선 바리톤의 팝콘 사운드를 펑펑 터뜨려준다. 얌전한 럭셔리카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숨겨뒀던 맹수의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낸 AMG SL 63의 드라마틱한 변신은, 오랜 시간 꾹꾹 참아왔던 감정을 시원하게 터뜨리며 일탈을 선언하는 노래 속 화자의 당찬 모습과 절묘한 교집합을 이룬다.
이 찬란하고 황홀한 드라이브가 끝난 뒤, 우리는 십중팔구 다시 현실로 돌아가 치열하고 고단한 일과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진짜 사직서를 쿨하게 내던지지는 못하겠지만, 메르세데스-AMG SL 63 4MATIC+의 스티어링 휠을 쥐고 가속 페달을 짓이기던 그 찰나의 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완벽하고 통쾌한 자유를 누린 일탈의 주인공이었다.
일상의 무거운 굴레를 가장 화려하고 폭발적인 방식으로 끊어내 줄 완벽한 드림카. 이 매혹적인 고성능 로드스터는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든든한 ‘일일 퇴사’의 동반자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혹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이 거침없는 맹수와 함께 달린다면 그 어떤 휴가보다 값진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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