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고척스카이돔의 거대한 스크린에 새겨진 에스파(aespa)라는 글귀는 시작부터 위태롭게 흔들렸다. 기존 에스파가 군림하던 세계, 광야에 피할 수 없는 균열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균열은 특이점과 맞닿는다. 기술적 도약을 의미하는 ‘특이점’은 낡은 세계의 붕괴가 불가피하다. 이는 곧 에스파가 열어젖힐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의미한다.

에스파가 지난 7일부터 8일까지 이틀간 데뷔 후 처음으로 고척스카이돔에 입성했다. 양일간 3만 5천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K팝 톱클래스의 위용을 과시했다. 2026-27 네 번째 월드투어 ‘SYNK : COMPLæXITY(싱크 : 컴플렉시티)’는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혼란을 기꺼이 끌어안고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에스파가 빚어낸 거대한 성장소설의 하이라이트였다.

◇ 멘트 거세한 파격…‘균열’의 다중 우주를 관통하다

이번 공연은 정규 2집 ‘레모네이드(LEMONADE)’를 기점으로 새롭게 전개되는 세계관을 담아냈다. 핵심 키워드는 ‘균열’이다. ‘ae-aespa’가 에러와 버그에 잠식되어 에스파와 갈등을 벌이는 복잡한 다중 우주가 무대 위에 펼쳐졌다.

에스파와 꼭 닮은 디지털 자아의 등장과 함께, 평화롭던 ‘마이 월드’는 낯선 두려움에 휩싸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거대한 혼란을 돌파하는 에스파의 방식이다. 무대는 ‘특이점 발생-침입-감금-각성-해결’의 5단계를 거치며 한 편의 거대한 서사극을 완성했다. 에스파의 과거-현재-미래가 담긴 대서사를 성장형으로 풀어냈다.

이 과정에서 멘트는 단 두 번으로 과감히 생략됐다. 친절한 설명이나 팬들과의 소통 대신, 철저하게 짜인 VCR과 무대 연출만으로 관객을 촘촘한 서사 속으로 끌어당겼다. 주어진 세계관의 덫에 갇히지 않고, 시련(레몬)이 던져지면 기꺼이 갈아 마시겠다는(레모네이드) 주체적인 태도가 돋보였다.

◇ 자작곡으로 이뤄낸 ‘각성’, 쇠맛 넘어선 미학적 성취

에러와 침입으로 빚어진 고립 속에서, 에스파를 구원한 것은 외부의 조력자가 아닌 멤버들 스스로의 ‘각성’이었다. 그리고 그 무기는 각자의 고유성을 완벽히 입증한 4인 4색의 솔로 음악이었다.

카리나는 직접 작사에 참여한 R&B 댄스곡 ‘16비트(16 Bit)’를 통해 끝없이 깨지고 붙기를 반복하는 픽셀에 자신의 내면을 비유했다. 윈터는 ‘새들 업(Saddle Up)’으로 당당하고 주도적인 태도를 화려한 보컬로 뽐냈다. 지젤과 닝닝 역시 직접 작곡과 작사에 참여해 각각 반전 매력이 돋보이는 ‘바이비포헬로(BYEB4HELLO)’와 웅장한 발라드 ‘아이 러브 유 벗 아이 가타 렛 유 고(I Love You But I Gotta Let You Go)’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여기에 카리나와 윈터의 ‘세레나데(Serenade)’, 지젤과 닝닝의 ‘롤리팝(Lollipop)’ 등 최초 공개된 유닛 무대까지 더해졌다. 세계관의 복잡성 안에서 개개인이 가진 색깔을 선명히 드러내며, 쇠맛을 넘어선 통쾌한 ‘신맛’으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 위기를 기회로…전 세계 25개 지역 향한 닻을 올리다

스스로 각성한 에스파는 마침내 ‘아마겟돈(Armageddon)’으로 결전을 치르며 ‘해결’의 단계로 나아갔다. 거대한 스펙터클로 폭발한 이 무대는 이지 리스닝 열풍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쟁취해 낸 에스파만의 고유성이 시각적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에스파는 과거로 도망치는 대신 에러와 혼란을 통쾌하게 돌파하며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진화시켰다. 이 모든 과정을 ‘블랙맘바(Black Mamba)’부터 ‘넥스트 레벨(Next Level)’, ‘슈퍼노바(Supernova)’에 이르기까지 무결점의 퍼포먼스로 쏟아냈다. 총 27곡의 세트리스트는 에스파가 무대 위에서 펼치고자 했던 ‘혼란 속의 주체성’이라는 메시지와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아떨어지며 관객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안겼다.

이제 에스파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날아오른다. 서울을 붉게 물들인 이들은 미주, 남미, 유럽 등 전 세계 25개 지역을 순회하는 거대한 다중 우주로의 글로벌 대장정에 돌입한다. 아이돌 가수의 전형성을 넘어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성숙한 작가가 된 에스파, 네 명의 여전사가 써 내려갈 ‘아름다움의 새 챕터’는 이미 찬란한 궤도에 진입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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