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고혜진 PD는 JTBC 예능국 출신이다. 2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 했다. ‘크라임씬’ ‘님과 함께’ ‘아는 형님’이 대표작이다. ‘아는 형님’은 원년 멤버다. 그러다 당시 드라마 국장이었던 김석윤 PD에게 “나도 드라마를 찍고 싶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진정성 있는 용기가 예능 PD 출신인 김 PD의 마음을 훔쳤나보다. 첫 조연출 작품은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다. 조연출과 B팀 연출을 거쳐 ‘신입사원 강회장’으로 데뷔의 기회를 맞았다.
김순옥 작가가 크리에이터를 맡고 ‘판도라 : 조작된 낙원’을 집필한 현지민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다. 강용호(손현주 분)와 황준현(이준영 분)이 우당탕탕 박치기 이후 영혼이 체인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나치게 판타지성이 강하면서도, 가족애와 재벌가 권력다툼이라는 현실적인 키워드가 축을 이룬 작품이다. 그 교묘한 줄다리기를 훌륭히 수행한 인물이 고 PD다.

고혜진 PD는 최근 스포츠서울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데뷔할 시기가 되기도 했고, 대본도 재밌었다. 꼭 데뷔하고 싶다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저를 믿어준다면 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코믹적인 요소를 잘 넣으면서도 판타지와 현실성을 고루 가져간다면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이상한 ‘근자감’이 있었다”며 웃었다.
극성이 강하다. 자식이 부와 권력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설정부터, 각종 악랄한 행동이 빗발친다. 그 과정이 또 지극히 무섭지만은 않다. 적절히 코믹함도 있고, 빌런들이 잘 갖지 않은 허술함도 있다. 판타지와 핍진성이 매우 밸런스 있게 공존한다.
“이 드라마는 70대 재벌가 회장의 성장 서사예요. 가족애가 키워드죠.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라는 깨달음과 사랑의 표현방식에 대한 고찰도 있어요. 강용호(손현주 분)가 20대 황준현(이준영 분)에게 배우는 과정이에요. 70대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걸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최대한 이해시키려고 친절하게 내용을 반복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른들도 좋아해주셨나 봐요.”

박치기 이후 영혼이 뒤바뀐다는 설정이지만, 1회를 넘기고 나면 어느덧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된다. 이준영의 얼굴에 손현주의 내레이션은 찰떡같이 달라붙고, 강재경 역의 전혜진과 강재성 역의 진구 연기는 압도적이다. 이주명의 활발함이 받쳐주면서, 윤유선, 정재성, 김종태, 이성욱과 같은 힘 있는 배우들이 유기적으로 시너지를 냈다. 캐스팅은 고 PD의 추구미로 완성됐다.
“이번 작품엔 제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는 분들로 캐스팅했어요. 발이 땅에 딱 붙는 연기 하시는 분들을 좋아해요. 이성욱은 연출 입장에서 고민해주는 분이고 늘 아이디어가 많아요. 김종태는 수트핏이 최고죠. (정)려원 언니가 강력 추천했어요. 사실 쌍둥이가 킥인데, 전혜진과 진구는 코미디와 허술함, 카리스마가 동시에 되는 분들이에요. ‘대사를 이렇게 칠 수 있구나’를 느끼게끔 경이로운 순간이 많았어요.”

드라마는 언제나 조급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 촬영해야 하는 분량이 늘 많다. 카메라를 대고 첫 번째 ‘컷’을 외치는 순간 뒤를 돌아볼 수 없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힘의 분배를 해야 하는 것 역시 PD의 역할이다.
“모든 장면이 다 소중한 건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진짜 힘을 줘야 하는 신과 휙 치고 가야하는 장면이 있다고 봐요. 어떻게든 쪼개고 쪼개서 필요한 순간에 힘을 쓰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해서 익숙하기도 해요. 욕심만큼 쏟아붓지 못하는 순간이 늘 창작자에겐 힘든 순간이죠.”

이미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아침드라마로 기획한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영화로 개봉했다. 뛰어난 감각을 선보였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신입사원 강회장’ 역시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스타 PD의 탄생 기로에 있다. 이 빛을 보기 위해 고 PD는 외로움의 시간을 힘겹게 견뎠다.
“메인 PD는 정말 외로운 것 같아요. 판단과 선택, 그리고 책임의 연속이에요. 무섭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생각했던 나의 색을 입히는 과정을 배운 것 같아요. 작가, 배우, 모든 스태프들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PD는 선장으로서 그 간극을 맞춰가야 하는 거죠. 연출이 비전이 확고하고 계획이 분명한 걸 선호하는데, 또 저마다 이 작품의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가 달라요. 저도 뭔가 답답하고 외로운 시간이 있었는데, 편집 하면서 눈이 확 트이는 장면이 있었어요. 제가 느끼는 허전함이 있었는데, 다른 분의 아이디어를 듣고 깨달은 거였어요. 아마 다음 작품에선 조금 더 잘하지 않을까 싶어요.”

드라마의 화룡점정은 엔딩이다. 마지막까지 쭉 끌고 온 ‘신입사원 강회장’은 황준현이 또 영혼체인지를 한다는 엔딩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잘 끌고 와놓고 엉뚱한 선택을 했다는 ‘용두사미’ 엔딩이란 평가가 잇따랐다.
“저는 그저 재밌게 끝내겠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보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았나봐요. 준현이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 더 강하셨던 것 같아요. 사실 뼈 아파요. 시청자들은 이야기의 구조나 메시지보단 ‘캐릭터에 이입하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배움을 얻었죠. 다음엔 시청자의 마음을 고려한 엔딩을 하게 될 거예요.”
첫 작품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차기작의 기회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는 성과다. 고 PD는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주위의 시선에 의지하리고 했다.
“아직 뭘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업계에 베테랑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저에게 어떤 제안이 올 수 있는데, 그 제안의 이유와 배경을 들어보고 그 중에서 골라볼 생각이에요. 베테랑 분들의 눈을 믿어요. K-콘텐츠의 성장엔 제작하시는 분들의 놀라운 통찰이 있기 때문일테니까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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