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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주상기자] 2300년 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궁전 속, 화가와 모델 그리고 젊은 장군. 시녀로 보이는 여인들과 하인이 보이지만 아무래도 관람자의 시선은 세 명에 집중되고 있다. 화가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복사라도 하듯 캔버스에 똑같이 그리고 있지만 시선은 화려한 투구의 장군에게 향하고 있다. 젊은 장군 또한 손가락으로 지시를 내리는 듯 한 제스처를 취하며 화가를 쳐다보고 있다. 어떤 관계일까? 젊은 장군은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한 알렉산더 대왕이고 화가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칭송을 받던 아펠레스다. 그리고 눈부신 나신의 여인은 알렉산더 대왕의 애인인 캄파스페다.
2100년 후 ‘벌거벗은 마야’와 ‘옷을 입은 마야’라는 그림으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화가 프란치스코 고야는 모델이었던 마야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공작부인과 화가라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비결은 열정과 함께 둘만의 비밀스런 공간인 아틀리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펠레스와 캄파스페도 마찬가지였다. 헤타이라 출신으로 아름다운 미모는 물론 철학과 예술에 관심이 컸던 캄파스페를 모델로 매일 그림을 그렸던 아펠레스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게다가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발가벗고 있었으니.....,아무리 장인이라 하더라도 아펠레스의 심장은 심쿵했을 법. 캄파스페 또한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펠레스의 순수함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대왕의 애인과 화가, 실로 위험한 관계가 아닐 수 없지만 사랑의 마력은 어쩔 수 없었다.
전쟁과 정복으로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알렉산더 대왕.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매일 보고 싶어 그림을 만들게 했지만,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캄파스페와 사랑에 빠진 아펠레스, 애정행각에 몰두하느라 그림은 아예 뒷전이다. 재촉이 오면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등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다. 하지만 둘만의 밀회가 오래 갈 수 없는 법. 지존의 궁궐에서 황제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랴. 알렉산더에게 발각된 두 사람은 대왕의 심판을 받을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누구였던가. 누더기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았지만 ‘대왕이 햇볕을 가린다’는 핀잔을 듣고 껄껄 웃으며 자리를 피한 관대함의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도 그의 관대함은 발휘됐다. 알렉산더는 “아름다움은 나보다 예술가들이 더 잘고 있는 법, 캄파스페를 아펠레스에게 양도하노라”며 자신의 애인을 화가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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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였다. 알렉산더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왕국에서 세계최초의 제국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현재의 마케도니아는 고대 마케도니아와 전혀 다르다. 인종적으로는 슬라브계가 70%이고 나머지 30%는 이슬람교를 믿는 알바니아와 터키 계통의 사람들이다.
알렉산더 대왕시절에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는 ‘혼인정책’의 일환으로 그리스 계통의 마케도니아 인들이 전 세계에 퍼졌지만 제국의 몰락 이후 사분오열됐다. 특히 발칸 반도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중세 이후 열강의 화약고가 됐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탈,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슬라브계의 발흥으로 현재의 마케도니아 인에게는 알렉산더의 피가 거의 흐르지 않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20세에 왕위에 올라 31세에 세계를 정복했다.(당시의 세계관은 유럽과 이집트를 비롯해서 페르시아 제국과 그 너머 있는 인도를 지칭했다) 그의 스승은 인류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어렸을 때부터 철학, 윤리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알렉산더는 인도 정복을 앞두고 말라리아 걸려 사망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해 ‘최초의 정복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가 획득한 영토를 넘어선 인물은 1400년 후 나타난 몽골의 징기스칸이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문화를 접목한 헬레니즘 문화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인도의 간다라 문화가 좋은 예이다. 사후 그의 제국은 여러나라로 분열됐다. 특히 휘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건설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죽을 때까지 300년간 지속됐다.
▶아펠레스-그리스의 이오니아 출신으로 에페수스에서 그림을 배웠다. 뛰어난 실력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에게 발탁돼 궁전 전속화가가 됐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더에게도 발탁돼 그와 함께 원정에 참가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황룡사에 소나무를 그렸더니 까치가 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를 가진 신라의 화가 솔거처럼 아펠레스도 그에 못지않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어느날 아펠레스와 동료화가가 누가 그림을 잘 그리나 내기를 하며 벽에 암말을 그렸다. 인간의 눈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 모두 잘 그렸지만 대왕의 애마인 부케팔로스가 아펠레스가 그린 암말을 보더니 갑자기 돌진해 사랑을 나눠 이펠레스의 승리로 끝났다’라는 일화가 전해온다.
또한 그의 그림은 폼페이의 벽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스 화산의 폭발로 일거에 잿더미가 된 폼페이는 19세기 발굴되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벽화를 비롯해서 다양한 조각품과 장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유명 작가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이 유행했는데 폼페이에서 발견된 ‘Venus Anadyomene(파도위로 떠오르는 비너스)’와 ‘Battle of Issus(이수스의 전투)’ 는 아펠레스의 그림을 모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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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타이라-[에로티시즘 in 아트]‘아름다움과 위선의 경계에서~’, 제롬의 ‘법정의 프리네’ 참고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68&aid=0000317284# |
▶프란세스코 트레비사니(Francesco Trevisani, 1656 ~ 1746) - 이탈리아의 화가로 바로크시대에 활동했다. 유명한 건축가인 안토니오 트레비사니의 아들로 베니스에서 안토니오 잔키에게 사사했다. 로마에서 주로 활동하며 추기경인 피에트로 오토보니의 후원을 받았다. 우르비노 성당을 위한 벽화 등 스케일 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주요작품으로 ‘캄파스페를 그리는 아펠레스’를 비롯해서 ‘루크레티아의 자살’, ‘디아나와 엔디미온’ 등이 있다. rainbow@sportsseoul.com 그림출처 | 위키아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