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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왼쪽)과 박지성. 제공 | SBS


[스포츠서울]20세기 영웅 ‘차붐’이냐, 21세기 영웅 ‘지성’이냐.

차범근(61)과 박지성(33), 두 스타 중 누가 더 위대할까. 축구팬들이라면 이 주제에 관해 한 두번은 토론해봤을 것이다. 1980년대 ‘유럽 최고의 리그’ 독일 분데스리가를 휘저으며 한국을 빛낸 차범근과 2000년대 ‘세계 축구 엘도라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누비며 아시아 아이콘으로 활약했던 박지성은 한국 축구가 숱한 좌절과 시련에도 당당하게 꺼낼 수 있는 자랑이었다. 그래서 축구팬들은 둘이 한 시대에 태어났을 경우, 더 빼어난 선수가 누군가에 대해서도 축구장에서 혹은 온라인 상에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언론 등에서 둘을 공식적으로 비교하기는 좀 애매모호했던 게 사실이기도 했다. 둘이 활약한 시대가 달랐고, 포지션이 달랐고, 세계 축구 흐름이 달랐기 때문이다. 박지성이 올 봄까지 현역에서 계속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도 둘을 한 공간에서 다루기 어려웠던 점이었다.

이제 박지성도 은퇴하면서 선수 생활 마침표를 찍었다. 둘은 과연 어떤 선수였고, 세밀하게 파고들면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을까. 그래도 점수를 매긴다면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스포츠서울 ‘시공초월 라이벌’에서 과감하게 다뤄봤다.

◇두 영웅 ‘다른 듯 같은 행보’

자세히 뜯어보면 둘의 행보엔 비슷한 점도 제법 있다. 우선 수치상으론 유럽에서 11시즌을 뛰고 은퇴했다는 점이 같다. 차범근은 공군을 제대한 1978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유럽 생활 첫 스타트를 끊었다. 이어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1983년 바이엘 레버쿠젠에 입성했다. 1989년 여름을 끝으로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박지성은 2003년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을 시작으로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2012년 퀸스파크 레인저스 등 두 프리미어리그 클럽에서 뛰었고 지난 해 PSV로 리턴하고는 1년 뒤인 올 상반기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둘 모두 국내 혹은 아시아 무대로의 복귀 없이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며 ‘정상에 있을 때’ 미련 없이 홀연히 떠났다. A매치 100회 이상을 뛰어 ‘센추리클럽’에 가입(차범근 121경기.55골,박지성 100경기.13골)했으면서 차범근이 372경기, 박지성이 346경기를 소화하는 등 ‘코리안리거’ 중 유럽 무대에서 300경기 이상을 출전한 둘뿐인 선수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차범근은 공격수와 윙포워드를 다채롭게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 박지성 역시 측면과 중앙 미드필더를 자유롭게 오가는 등 멀티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도 둘을 연결하는 코드다.

◇차붐-지성에 왜 열광했을까

그러나 둘이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단순한 수치와 ‘빅 리거’라는 점을 떠나 한국과 아시아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그 시대 세계 축구가 원하는 흐름을 고스란히 쫓아가며 최고의 무대에서도 통했기 때문이다. 이상윤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차붐은 볼 컨트롤과 스피드가 좋았다. 여기에 상대 수비수를 앞에 달면서도 골을 넣는 결정력 등 1980년대 공격수를 뛰어넘는 스타일을 갖춰 성공할 수 있었다”며 “박지성도 2000년대 축구에 잘 맞는 플레이를 해냈다. 감독이 원하는 축구에 맞춤형 선수로 변신, 언제든지 제 몫을 소화했다. 그게 둘 다 세계 무대에서 각광받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유럽축구 현장을 10년 넘게 오갔던 최원창 수원 구단 차장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코드에 맞춰 둘의 활약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했다. 최 차장은 “100년을 훌쩍 넘긴 한국 축구 역사는 크게 ‘차범근 시대’와 ‘박지성 시대’로 나뉜다”며 “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선진국처럼 잘 살아보세’로 압축되던 ‘차범근 시대’가 질(質)적인 도약을 희망했던 시기였다면, ‘박지성 시대’는 대한민국도 명품이 될 수 있다는 격(格)의 진보를 기대하게 만든 시기였다”고 전했다.

[SS포토]시축하는 차범근 해설위원
[스포츠서울] 30일 서울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 바이엘 04 레버쿠젠의 친선경기에 앞서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뛴 바가 있는 차범근 해설위원이 시축을 하고 있다. 2014. 7. 30.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그래도 승부 가른다면? 차범근 판정승

둘 다 훌륭하지만 굳이 점수를 매긴다면 누가 더 우위에 설 수 있을까. 익명을 요구한 한 축구인은 “유도 경기에서 두 선수가 팽팽한 접전을 벌여 결국 심판 3명이 판정승으로 결판을 내야 하는 상황 아니냐. 그 만큼 승부를 가리기가 힘들다”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차범근이 아주 근소하게 앞서는 쪽에 결론을 내리고 있다. 두 선수가 처했던 환경이나 경기장에서 보여 준 임팩트, 어려움을 극복한 스토리 등에서 선배 차범근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차범근이 공격수라는 특성을 감안해도, 독일과 유럽 무대에서 넣은 121골은 한국 선수가 쉽게 낼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며 “특히 1970년대 말 한국 축구는 2000년대와 다르다. 박지성도 위대하지만, 그는 시드니 올림픽과 한.일 월드컵 등을 통해 이미 세계 축구에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에서 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난 차범근 쪽에 표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반면 고려대와 전남에서 실제 선수 생활을 했던 김태륭 스포티비 해설위원은 “어느 선수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년을 뛰며 인정받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또 월드컵 활약을 집어넣어야 할 것이다. 월드컵에서 3골을 넣는 등 A매치 임팩트 면에선 박지성도 뒤지지 않는다”며 박지성에 한 표를 줬다.

◇해외에서는? ‘역시 차붐’

국제적으로도 둘 다 아시아 최고 수준을 인정받은 가운데 차범근이 약간 앞서는 형국이다.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은 지난 해 ‘아시아 최고 선수’ 랭킹을 발표했는데, 차범근이 1위, 박지성이 2위를 차지하며 한국 축구 위상을 빛냈다. 특히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에서 뛴 적이 있는 이란의 간판 공격수 알리 다에이, 이탈리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일본 출신 명품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도시가 차범근과 박지성에 말려 각각 3위와 4위에 그쳤다는 게 인상 깊다. 지난 5월 영국 언론 ‘스포츠몰’이 선정한 ‘한국 최고 선수’에서도 둘은 똑같은 순위를 받았다. 1위는 차범근이었고, 박지성이 그 다음에 위치해 2위를 차지했다. 홍명보와 이운재, 이영표, 황선홍이 3~6위로 뒤를 이었다.

[SS포토]맨유 앰버서더 박지성, '이젠 홍보대사로 활동을!'
[스포츠서울]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앰버서더 박지성(왼쪽)과 제이미 리글 맨유 아시아 사장이 13일 오전 그랜드하얏트서울 호텔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박지성의 옛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차범근-박지성이 한 시대였다면…

‘차붐’은 해결사 기질이 뛰어났다. ‘지성’은 헌신이란 단어와 어울렸다. 두 선수가 한 시대에 태어나 태극마크를 함께 달았다면 한국 축구도 세계를 놀라게 할 성적을 내지 않았을까. 차범근은 1970~80년대에 아시아 선수답지 않게 기술와 폭발적인 스피드, 골결정력이 탁월했고, 그 당시 윙포워드 답지 않게 헤딩도 뛰어났다. 박지성은 쉼 없이 뛰는 지구력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펼치는 공헌도, 상황에 따른 공.수 가담이 훌륭했다. 차범근이 30년 정도 늦게 태어나서 박지성과 한 대표팀을 이뤘다면 홈이 아닌 원정에서도 월드컵 8강 이상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게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준희 위원은 “걸출한 공격수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한국적 현실에서 차범근 감독이 더 생각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차범근이 앞에서 휘젓고 박지성이 뒤에서 받쳐주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그러나 현실에선 지난 6월 인도네시아 박지성 자선축구를 통해 둘이 딱 한 차례 호흡을 맞춘 것이 전부다.

◇3번째 영웅 나올까

언젠가 차범근 박지성과 같은 레벨에서 비교될 선수가 있을까. 전문가들은 1순위로 분데스리가 레벨을 뛰어넘고 있는 손흥민을 꼽는다. 이제 22살에 불과하지만 함부르크와 레버쿠젠을 통해 착실히 성장하고 있는 손흥민이 나중에 명문 구단으로 이적, 한국 축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힐 것으로 보고 있다. 스피드가 좋은 손흥민은 양발 사용 능력과 한국인 답지 않은 개인 전술까지 갖췄다. 차범근이나 박지성처럼 현대 축구의 변화 흐름을 잘 따라잡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드필더로는 패스와 퍼스트터치가 좋은 기성용이 주목받으며, 10대에선 드리블이 좋고 개인기와 패스가 탄탄한 이승우도 미래 제2의 차범근, 제2의 박지성 자원으로 여겨진다.
김현기기자 silv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