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이유성 전 단장 [포토]
이유성 전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이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스포츠서울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영조 기자 kanjo@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김경무전문기자] 장장 38년6개월의 세월을 쉼없이 달려온 스포츠 인생. 그 길고도 먼 여정을 마무리하고 자유인이 된 그는 여유있고 매우 행복한 표정이었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이기고 지는 것만 생각하고 살아왔잖아. 한번도 제대로 쉰 적도 없어. 그런데 여태까지의 그 긴 여정을 여러분 덕분에 큰 탈 없이 잘 내려온 것에 너무 감사드리지. 지난 7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사람들 전혀 안 만났어. 일체 연락도 끊고. 요즘 손녀와 놀고 운동도 하니까 너무 좋아. 앞으로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어.” 몇달 전 그를 만났을 땐 신장이식수술 후유증 탓인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이젠 얼굴이 활짝 핀 것 같다.

지난 1991년 4월 지바(일본)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남북단일팀(여자) 코치를 맡아 코리아의 여자단체전 우승 신화를 만들어낸 주역인 이유성(63) 전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이다. 내년까지 40년을 채울 수 있는 나이였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며 회사 관계자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돌연 잠적한 그의 사표는 지난 8월31일자로 수리됐다. 서울 공덕초등학교 5학년 때 탁구선수로 출발해 실업탁구선수(대우중공업) 및 국가대표, 명지여중고와 대한항공 코치 감독, 탁구 여자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 스포츠단 단장, 대한체육회 경기력향상위원회 및 남북교류위원회 위원 등을 거치며 한국 스포츠와 동고동락했던 그였다. 그는 지난 10일 스포츠서울과의 첫 단독인터뷰를 통해 숱한 영광과 회한이 교차한 그의 스포츠인생을 함께 돌아봤다. “그만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려니 정말 쑥스럽네.”

지도자로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언제였을까. 이 전 단장은 탁구 남북단일팀의 쾌거와 함께 현정화(현 한국마사회 여자탁구팀 감독)의 1993 예테보리(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식 금메달 때를 꼽았다. “사실 코치와 감독을 하면서 운이 좋아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많이 냈다. 최원석 회장이 대한탁구협회를 이끌며 한국 탁구의 전성기를 이끌 때였다. 아무래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지바 세계탁구대회 남북단일팀의 쾌거다. 그때 에피소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북한의 장웅 위원장이나 김영진 단장 등 그 양반들이 나를 엄청 신뢰해서 45일간 내 직책은 코치였지만 전권을 받고 다 했다. 그런 것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이후 북한에 가보니까 대우를 잘해주더라.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 지도자로서 명성도 쌓고 보람도 있었다.” 1991년 4월29일 당시, 현정화와 홍차옥(남측), 리분희와 류순복(북측)으로 이뤄진 남북단일팀은 세계 최강 중국과의 여자단체전 결승전에서 종합전적 3-2 승리를 거두고 우승하며 한반도는 물론 지구촌에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유성
지난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중국을 누르고 여자단체전 우승 쾌거를 이룬 남북단일 여자팀. 당시 이유성 코치가 시상대 왼쪽에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이유성 대한항공 스포츠단 전 단장 제공

이 전 단장은 “(이후 2년 뒤) 현정화가 세계대회 개인단식 1등한 것은 애초 0.1%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면서 “대표팀 감독이 되자마자 첫해 얻어낸 엄청난 행운이자 쾌거였다”고 돌아봤다. “대회 전 현정화가 은퇴하냐 마느냐로 힘든 때였고, 예테보리 세계탁구는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대회였다. 근데 정화가 덜컥 금메달을 따냈다. (난공불락으로 세계 탁구의 마녀로 불리던) 덩야핑이 (싱가포르 에이스) 진준홍, 치아홍(덩야핑과 중국 쌍두마차)은 류순복한테 지고, 이분희도 떨어지고…. 정화가 약세를 보였던 이 3명이 탈락해버린 것이다. 앞으로 단체전은 몰라도 개인전은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선수들도 잘 만났고, 당시 탁구협회 최원석 회장과 김창제 부회장(작고) 그런 분들이 진짜 원동력이 됐다.”

한국 탁구는 그 이전까지 여자의 경우 1973 사라예보(유고) 세계선수권대회(이에리사-정현숙) 등에서 두차례 단체전 금메달을 딴 적은 있으나 개인전 금메달은 없었다. 이 전 단장은 “그때 나도 열정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넘기 어려운 고비를 몇번 넘겼다”며 “코치 때도 감독 때도 세계를 제패했다. 지도자로서로 명예를 얻은 것은 큰 축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93~1995년, 그리고 2002~2004년 탁구 여자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탁구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은 이씨는 2005년 3월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프로배구와도 첫 인연을 맺었고, 15년 남짓 그쪽에서도 대단한 일을 해냈다. “돌아가신 조양호 회장이 배구 때문에 단장을 시킨 것 같다. 대한항공이 맨날 꼴찌를 할 때였는데, 가보니 선수단 환경이 너무 안 좋았다. 인하대체육관 빌려쓰고, 숙소로 아파트를 빌려쓰는데, 덩치 큰 애들이 뭐 프로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수들이 공부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조양호 회장한테 그대로 말씀드려 지금 신갈의 전용숙소를 만든 것이다.” 그는 “ 태릉선수촌에 직접 가서 새로 지은 숙소를 보고, 그대로 맞춰서 지었다”며 “지금도 숙소와 체육관이 붙어 있어 선수들이 훈련하는데는 지장없다. 그걸 시작으로 조양호 회장이 전폭 지원해줬고, 대한항공 남자배구단이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 틀을 깨고 우승했다. 그 부분 단장으로서 보람을 느낀다. 대한항공 배구단은 당분간 몇년 동안은 정상에 있을 것이다. 선수 확보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고 했다.

이 단장 부임 이후 대한항공은 프로배구 V리그 정규리그에서 3번 우승했고, 챔피언전에서도 한번 정상에 올랐다. 그는 “정규리그 우승이 중요한 데 신영철 감독이 있을 때다. 신 감독 있을 때 대한항공 배구단이 잘 세팅돼 계속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 분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또 “대한항공 배구단이 모범적인 팀이 됐다. 돈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애사심을 가지며 팀에 헌신했다”며 “선수들의 애사심과 충성심이 다른 구단보다 크다. 한선수 곽승석 정지석 등 우리팀 에이스들은 큰 돈으로 유혹해도 다른 팀에 안간다. 그게 명문팀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단장으로서 선수들한테 너무 고맙고 감사한다”고 했다. 그는 단장 시절 “대한항공 팀이 총재의 회사라는 것 때문에 성적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대한항공 이유성 전 단장 [포토]
이유성 전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이 지난 10일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 뒤 상념에 잠겨 있다. 강영조 기자 kanjo@sportsseoul.com

지난해 4월 별세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을 때 대한항공 빙상팀을 만들어 모태범, 이승훈, 이상화 등이 이후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기여한 것에 대해서도 이 전 단장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당시 박성인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이 한국체대 소속이던 3명을 스카우트비 1원도 안 받고 대한항공 팀에 넘겨줬다. 8년 동안 평창을 준비하려면, 평창에서 대한민국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려면 빙상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내가 판단했다. 그리고 진짜 금메달을 땄다. 계획대로 잘 성사돼 조양호 회장도 보람을 느꼈다.”

원래 탁구인인 이 전 단장은 탁구계에 대해 아쉬움도 많다. 조양호 회장이 2008년부터 10년 넘게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맡아 100억원이 넘는 재정적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의 생전에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선사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분이 살아계실 때 금메달 하나 못 받친 게 한이자 오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도자들이 분발해야 한다”며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현정화 유남규 김택수 등 지도자들은 올림픽 메달 가지고 30년 넘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선수를 키우는 기술자여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다. 그게 안타깝다.” 이런 인식 아래 그는 “앞으로 시간될 때마다 후배 지도자들을 한 명 한 명 불러서 같이 밥먹으면서 조언하고 자극을 주겠다”며 “한국 탁구 마지막 기회인데 너네가 지도자로서의 잘해라고 당부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감독으로서 오랜 동안 몸담았던 대한항공 여자탁구팀에 대해 “역사와 전통 있는 팀”이라며 “지난해 단장 시절 ‘국내 1등은 필요없다. 세계 1등이 목표다’라는 취지에서 탁구신동 신유빈을 뽑아 한국 탁구의 센세이션을 일으켜 볼 계획을 세웠다. 이게 내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강문수 감독도 뽑은 것”이라고 밝혔다. 떠나는 뒷모습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사람,그게 바로 뼛속까지 체육인이라고 자부하는 이유성의 진면목이다.

kkm100@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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