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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호의 현역시절. 사진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윤소윤기자] 제75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대회가 한창인 목동, 신월 구장에 낯익은 얼굴이 등장하자 선수들이 웅성거린다. TV에서 보던 ‘만루홈런의 사나이’가 말끔한 사복 차림으로 차세대 프로야구 스타들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충북 보은에서 열렸던 전국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메이저리그(ML) 필라델피아로 코치 수업을 받으러 갔던 ‘꽃’ 이범호(39)가 친정팀 KIA 스카우트로 돌아왔다.

활동무대를 광주-KIA 챔피언스필드가 아닌 아마추어 대회가 열리는 구장 스탠드로 옮겼다. 지난해 20년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팀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 지 1년여 만에 원석을 발굴하는 것으로 재기를 시작한 셈이다. 지난 27일 스포츠서울과 통화가 된 이범호는 “보는 눈을 키우고, 귀를 열고 있다”는 말로 복귀 인사를 대신했다.

애초 구상대로라면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필라델피아 산하 루키 팀에서 젊은 ML 유망주들과 구슬땀을 흘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1월 태평양을 건넌 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세계 대유행(팬데믹)에 빠졌고, 3월 말까지만 해도 “아직은 괜찮다”던 플로리다주도 확산세를 막을 수 없었다. 가족과 상의 끝에 예정됐던 10월보다 5개월이나 앞당겨 귀국하기 한 이범호는 가장 먼저 친정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뭘 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두루두루 배우고 싶다고 하니 스카우트 업무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원석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 프런트든 코치든 제2의 인생을 단계별로 설계하라는 구단의 배려였다. 자신도 “구단에서 경험을 쌓는 게 큰 힘이 될 거다. 프런트 업무를 하면서 구단이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KIA에 감사하다”며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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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호. 사진 |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이범호는 “대구고 재학시절을 돌아보면 야구를 썩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스카우트가 온 날은 이상하게 날아다녔다. 나는 스카우트가 온줄 몰랐지만, 감독님께서 어느 날 ‘너 프로 가겠다’고 말씀하시더라.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인데, 당시 한화 스카우트께서 나를 좋게 봐주신 덕분에 그래도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프로 선수로 많은 것들을 누렸다”고 돌아봤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 인생이 완전히 바뀐 셈인데, 이제는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됐다.

지난달 황금사자기 전국고교대회 관전을 시작으로 고교, 대학야구 무대를 누비고 있다. 현역 시절에도 후배들의 장단점을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선수 보는 눈을 키우는 과정이다. 아마추어를 스카우트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는 눈을 키웠고, 좋은 팀은 어떤 마인드를 갖고 선수를 발굴하는지 공부하기 위해 귀를 열어놨다”며 자신을 낮췄다.

작은 눈을 한껏 키워 집중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그는 “가능성을 찾게 되더라. 프로 무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따라갈 역량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게 스카우트의 가장 큰 역할”이라며 “좋은 선수가 있으면 직접 학교에 가서 훈련도 볼 계획”이라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생각보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다. 어이없는 플레이도 많지만 학생선수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린 선수를 지켜보는 게 나에겐 새로운 재미”라며 웃었다.

두 달이 채 안 되지만 스카우트의 고충을 벌써 느끼는 듯했다. 이범호는 “옛날에 나를 뽑았던 분들이 이렇게 고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최근 우리 후배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걸 보니 또 다르게 보인다. 스카우트 팀에서 KIA를 위해 좋은 선수를 많이 뽑아줬고, 정말 많은 준비를 한다는 걸 느꼈다. 밖에서 보니까 많은 게 보인다”고 말했다. 시선은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가 있지만, 마음은 한창 시즌을 치르고 있는 후배들과 함께 있다. 그곳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게 이범호의 생각이다.

당장은 아니다. 이범호는 아직 광주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 부산, 강원도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제 인재를 찾는데 집중할 계획이다. 다시 활짝 필 ‘꽃’의 야구는 여전히 배움의 연속이다.

younw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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