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
삼성 시절 김응룡 감독(오른쪽)과 선동열 수석코치.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ol.com

[스포츠서울 장강훈기자] 2004년 어린이날은 삼성에 잊지 못할 악몽이다. 당시 삼성은 현대와 어린이날 더비에서 8-3으로 여유있게 앞서던 9회초 마무리 임창용이 정성훈에게 만루홈런을 얻어맞아 동점을 허용한 뒤 연장 11회 10-14로 역전패했다. 어이없는 패배 탓일까. 삼성은 5월 18일 대구 KIA전 2-5 패배까지 창단 첫 10연패 수모를 겪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외국인 타자 트로이 오리어리는 시범경기를 앞두고 돌연 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가까스로 복귀했고, 4월 한 달 간 9홈런 20타점으로 펄펄 나는듯 하더니 5월들어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삼성이 10연패를 당하는 동안 홈런 단 한 개도 때려내지 못했고 7타점으로 헤맸다. 1983년 해태 감독으로 프로 지휘봉을 잡아 통산 10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김응룡 감독(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생애 첫 10연패 수모를 겪은 날 삼고초려끝에 영입한 선동열 수석코치(전 야구대표팀 감독)를 대구 시내 모처로 불러냈다.

김응룡
지난 2004년 5월 18일 대구 KIA전에서 진갑용 등 몇몇선수들이 삭발까지 하고 비장한 각오로 연패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10연패한 삼성 김응룡 감독이 경기내내 안절부절 하며 불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선 수석코치가 김 감독의 단골 식당에 들어섰더니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건넸다. 팀이 연패 중이라 죄인의 심정으로 소주를 ‘원 샷’하자 김 감독은 “야, 힘들어서 못하겠다. 네가 감독해”라고 폭탄발언을 했다. 선 전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장기 연패에 돌입하자 팀 안팎으로 흉흉한 소문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선동열이 감독 자리를 노린다는 얘기부터 별의 별 소문이 돌았다. 감독께서도 선수단을 장악하려면 코칭스태프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속마음을 떠볼 겸, 하소연할 겸 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며 껄껄 웃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당시 정서를 고려해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 펄쩍 펄쩍 뛰었다. 선 수석코치는 “감독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더 열심히 투수들 이끌고, 감독님 잘 보좌하겠습니다. 화 푸시고 팀 재정비 하시죠”라며 거듭 만류했다. 한참 실랑이를 하던 김 감독은 애제자인 선 수석코치의 진심을 확인한 뒤 “그래? 그럼 내일부터 열심히 해 봐”라며 못이긴척 ‘사퇴’ 의견을 거두어 들였다.

선동열-(2003~)
10연패에 빠진 삼성 선동열 투수코치가 그 옛날 함께 뛰었던 KIA 이종범의 타격을 침울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스포츠서울DB)

선 전 감독은 “팀이 계속 패하니 허탈감에 저녁도 건너 뛴 터라 배가 너무 고팠다. 앉자 마자 독한 소주를 맥주잔으로 들이켰으니 속도 쓰리고, 미치겠더라”며 “감독님께서 ‘내일부터 열심히 해’라며 소주를 다시 권하셨는데, 마침 불 판 위에 삼겹살 서너점이 알맞게 익어 있더라. 주신 술을 마시고 겨우 안주 한 점 먹나 싶었는데, 젓가락으로 스윽 긁어 한 번에 드시고는 자리를 파하셨다. 고기 한 점만 남겨주셨어도 덜 섭섭했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말 할 수 있는 에피소드지만, 당일 그 순간만큼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어쨌든 삼성은 감독과 수석코치의 허심탄회(?)한 대화 이후 거짓말처럼 반등에 성공해 정규시즌을 2위로 마쳤다. 투수 기용에 관한 전권을 받은 선 전 감독은 훗날 삼성 왕조의 기틀이 되는 강한 마운드 구축을 이끌었고, 이듬해 김 전감독이 사장으로 영전한 덕에 지휘봉을 물려 받아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김 회장과 선 전감독은 여전히 독독한 사제의 정을 나누고 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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