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살다

[스포츠서울 정하은기자]“‘이제 마침표만 찍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구나.’ 이 댓글이 제 마음을 울렸죠.”

지난달 KBS 드라마스페셜 2019의 네 번째 작품 ‘그렇게 살다’가 고령화 사회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고찰해보는 시간을 선사하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살다’는 수년째 노인 빈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사람답지 않은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최성억(정동환 분)의 이야기를 통해 고령화 사회와 노인 빈곤 문제를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가슴이 뭉클한 작품”, “단막극의 가치를 보여줬다” 등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그렇게 살다’를 집필한 촤자원 작가(40)는 “제가 현실을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너무 가슴 아프게 한 건 아닐지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했다.

강력계 형사로 40년, 경감으로 퇴직하기까지 청렴하게 살아온 성억.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치매 환자인 아내의 병원비 장기 미납으로 퇴원 통보를 받고, 아들의 사업 자금을 대주기 위해 공무원 퇴직 연금까지 모두 빼주고 끼니 걱정을 해야할 상황에 놓인 그는 근처 상가의 경비 자리를 구하게 됐다. 하지만 만성 천식에 폐암을 앓고 있는 병모(김기천 분)를 대신하는 자리였고, 아픈 아내를 돌보는 병모의 처지에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경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작을 일으킨 병모를 죽도록 내버려 둔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 후, 죄책감 속에 경비 생활을 시작한 성억은 형사 시절 자신에게 검거됐던 범죄자 박용구(주석태 분)가 그날 밤 목격자로 나타나 경비직에서 물러나라고 협박을 가한다. 결국 두 사람은 몸싸움이 벌였고 용구의 머리를 돌로 가격한 성억. 살려달라는 용구의 애원을 그는 살기 위해 외면한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이날의 범행은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오래된 TV를 사용하는 성억의 집에 놀이터 CCTV 화면이 그대로 생중계됐고, 치매 환자인 아내가 이를 모두 지켜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성억이라는 캐릭터는 경찰로 퇴직하신 최 작가의 작은 아버지가 모티브가 됐다. “비록 작은 아버지는 연금을 받으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 여쭤봤다. 그러자 ‘그냥 살지’ ‘그냥 살아’라고 말씀하시는데 뭔가 가슴 속에서 ‘훅’ 올라오더라”라며 “성억이 딱 우리 부모님 나이대다.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만약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마음이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집필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밝혔다.

‘그렇게 살다’ 말미, 사람답게 살고자 사람답지 못한 선택을 해버린 성억은 아내까지 떠나 보낸 후 버스에서 포효에 가까운 울음을 터트린다. 이는 드라마의 클라이맥스 부분이기도 하다. 최 작가는 “성억은 크게 소리 내어 울어본 적 없는 사람일 거 같았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적도 없는 할아버지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은 어떨지 생각해봤다. 그냥, 사는 거에 대한 서글픔이지 않았을까”라며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평생 지켜온 자신의 신념에 가족까지도 부정당하는 상황 그리고 그 원인이 모두 생계 때문이라는 거에 화가 나고 서글프지 않았을까. 살아있다는 상황 자체가 슬펐을 거 같다”고 해석했다.

최 작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첫신과 마지막신에서 성억이 밥 먹는 장면이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경찰 시절의 표창들 대신 아내 태숙의 영정 사진만이 걸려있고, 묵묵히 홀로 밥을 먹는 성억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먹먹함을 안겼다. “보통 ‘살다’라고 얘기했을 때 가장 근접하게 붙는 동사가 ‘먹다’다. ‘먹고 살다’라고 말하지 않나. 모든게 먹고 살아야 해서 일어나는 일이고 가장 근원적인 일이다. 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의미를 설명한 최 작가는 “밥을 먹으며 감정없는 표정은 누구한테나 있는 쓸쓸함 같았다. ‘머지않은 미래 같다’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전 미래 같지 않고 현실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살다 인터뷰

‘그렇게 살다’는 한시간 분량의 짧은 단막극이었지만 작품이 남긴 여운만은 길었다. ‘고령화 사회와 노인 빈곤’,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을 남겼다. 최 작가는 ‘그렇게 살다’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학원 강사로 10년, 그리고 식당 운영을 4년. 작가라는 꿈을 꾸지만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선택해야 했던 최 작가는 성억의 이야기가 단순히 젊은이들이 아닌 노인의 문제, 현실이 아닌 미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이 신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했다. 식당을 운영했는데 상권 경쟁이 심하니까 주변 상인들이 선을 많이 넘더라. 그들을 보며 ‘저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돼?’라고 비난했는데 나중에 보니 나도 그 사람들과 싸우며 똑같이 하게 되더라”라고 회상하며 “내가 갖고 있는 신념이 먹고 사는 것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울감과 자괴감에 빠졌다. 성억은 신호위반 한번 안한 사람이지만 살인이라는 더한 짓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인물이 변해서가 아니라 생계에 의해서라면 최성억이란 인물을 통해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살다’는 지난해 열린 제31회 KBS TV드라마 단막극 극본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최 작가는 10년 넘게 공모에 지원했지만 단 한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꾸준히 글을 써왔던 최작가는 “10년간 열심히 쓰기도 했지만 장사를 하면서는 사실 힘들었다. 그동안 써놨던 것들을 조금씩 고쳐서 내기도 했다”며 “이거라도 안하면 내 꿈에서 멀어지는 거 같았다. 처음엔 작가만 바라보고 열성적으로 했지만, 나중에는 이거라도 안 쓰면 자존감이 너무 떨어지더라. 생계를 위해서만 살아 있는 내가 싫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KBS드라마스페셜’ 단막극은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주요한 장이 돼왔다. ‘SKY 캐슬’ 유현미 작가를 비롯해, ‘동백꽃 필 무렵’ 임상춘, ‘녹두꽃’ 정현민, ‘비밀’ 유보라 등 현재 활약 중인 작가들도 KBS 단막극을 통해 데뷔했다. 마흔살, 다시 시작하기엔 혹은 꿈만 바라보고 매진하기에 적잖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최작가에게 ‘KBS드라마스페셜’은 작가로서 첫 단추를 끼우게 해준 희망이자 기회였다.

“단막극은 소설과 영화의 중간영역 같은 느낌이다. 감독님들 작가님들 개성도 맘껏 드러낼 수 있고, 다른 드라마에서는 하기 어려운 장르나 소재를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스페셜의 팬이었다. 숨겨진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다”며 “신인 작가들 사이에선 ‘드라마 스페셜’로 자신의 글이 방송되는 거에 대한 로망이 있다.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최 작가는 “어떤 극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 극 속 인물들을 잘 구현해보고 싶다. 그들을 보며 ‘내 모습 같다’란 소리를 듣고 싶다. 단순히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닌 살아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작가로서 바람을 드러냈다.

jayee212@sportsseoul.com

사진 | KBS2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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