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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온 나라를 들끓게 한 ‘조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씁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정치적 신념과 판단이 양심의 울림보다 더 큰 목소리 내는 걸 목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에는 전략과 전술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진영의 논리에 따라 양심적 판단을 달리해서는 안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대한민국의 리더는 왜 하나같이 도덕이나 양심과는 담을 쌓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것일까. 건강한 사회는 정치적 판단과 양심의 판단이 일치하거나 그 갭(gap)이 작아야겠지만 아쉽게도 한국사회는 점점 더 그 갭이 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특히 그 차이가 진영의 논리에 따라 ‘내로남불’의 양 극단을 오간다면 그건 사회가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강력한 사인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은 논리가 필요없는 자명한 우주의 진리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고 느끼는 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우주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논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 불거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사실상 앎과 삶의 불일치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옳다. 앎과 삶이 유리되는 결정적 이유는 둘 사이에 가교역할을 하는 몸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몸으로 터득하면 삶이 되지만 머리로만 익히면 그건 결코 삶의 영역으로 확장되기 힘들다. 지식이 몸에 단단히 새겨지지 않으면 앎과 삶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앎과 삶의 불일치는 사회를 이끄는 리더에게 도드라지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지식을 몸으로 터득하는 걸 꺼리고 머리로 사유하는데만 익숙해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지식을 머리로만 배우고 몸으로 터득하지 않으면 불일치의 간극은 더욱 넓어지고 결국에는 말과 행동이 다른 이율배반적 행태가 사회에 만연하기 마련이다. 몸의 철학은 그래서 위대하다. 몸은 우주와 존재와 교차점으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근거다. 몸으로 터득하지 못한 진리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리더에게 흔히 발견되는 앎과 삶의 균열과 불일치는 결국 어릴 때부터 몸의 철학을 등한시해온 우리의 교육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몸을 쓰는 체육을 폄훼해 저 밑바닥에 처박아두고 오로지 머리만 쓰는 지식의 패러다임속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살 수 있는 정치와 행동을 할 리는 만무하다. 국민들이 공감하는 정치란 곧 앎과 삶이 일치된 그런 정치다.

앎과 삶이 분리된 사회를 뜯어고치기 위해선 몸의 철학을 구현하는 체육이 희망이다. 교육의 핵심인 공부(工夫)만 해도 그렇다. 공부란 반복된 몸 훈련을 통해 새로움을 깨닫는 것에 다름아니다. 어린 아이가 쓰러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해 아장아장 걸으며 생명의 새로운 신비를 몸으로 깨닫는 걸 떠올려 보자. 그게 바로 공부다. 한국 사회을 이끄는 노블레스(noblesse)들의 이중성은 지식을 머리에 담기에 급급했던 교육 시스템에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들이 몸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 체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더라면 적어도 ‘내로남불’로 손가락질 받는 많은 정치인들은 없으련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몸의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주변부에 머물던 체육의 가치를 중심부로 끌어올려 새로운 의식혁명의 불꽃을 지폈으면 좋겠다. 지(智)-덕(德)-체(體)의 패러다임은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막을 내렸다. 앞으로 한국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 건 체(體)-덕(德)-지(智)의 패러다임이 아닐까. 앎과 삶이 유리된 분열의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건 몸의 철학이다. 머리는 거짓말을 하지만 몸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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