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김영후 "파란만장 선수 인생, 아쉬운 건 태극마크"[리와人드]
    • 입력2019-08-01 11:00
    • 수정2019-08-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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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 57경기 56골. 김영후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내셔널리그에서 남긴 기록이다.


내셔널리그에서의 센세이셔널한 활약은 그에게 '괴물 공격수'라는 별칭을 안겨줬다. 여기에 진하고 강렬한 눈썹이 인상적인 외모, 최전방 공격수로서 아주 큰 키는 아니지만 단단한 체격까지. 괴물이라는 별명이 정말 찰떡처럼 어울리는 선수였다.


축구 인생도 파란만장했다. 드래프트 낙방부터 내셔널리그 정복, 편견을 깬 K리그에서의 첫 시즌과 신인상 수상, 해외 리그와 K3리그 경험까지. 한국 축구계에서 겪을 수 있는 것은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후는 지난해를 끝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지금은 세종시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유소년 클럽을 창단했다. 축구 꿈나무들과 호흡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스포츠서울이 직접 들어봤다.


김영후가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축구부가 없는 학교에 다녔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른 학교 축구부 감독의 눈에 띄면서 스카우트됐다. 그는 "원래 운동하는 걸 좋아했다. 축구부터 야구 등등 여러 스포츠를 즐겼다"라며 "축구부 입단을 위해 전학을 가게 되면서 그 나이에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새벽 훈련도 하고 오후 훈련도 해야 해서 쉽지 않았다"라며 웃었다.


서울 보인고등학교를 거쳐 숭실대학교에 진학했다. 축구에 눈을 뜬 것은 숭실대학교 시절이었다. 윤성효 감독의 지도 아래 대학 무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높았다. 졸업 후 지원한 드래프트에서 낙방했다.


토종 공격수에게는 가혹한 K리그의 환경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대부분의 K리그 구단들은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 최소 1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K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공격수들도 주전 경쟁에 애를 먹는 상황이었다. 드래프트에서 공격수 선발은 후순위로 밀렸다.


프로의 선택을 받지 못한 김영후는 붕 뜬 신세가 됐다. 그는 "솔직히 번외지명으로도 뽑히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힘든 시기였다. 축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라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때 윤성효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김영후를 일단 학교에 불러들여 함께 몸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새 팀을 찾는 데 도움도 줬다. 성남의 연습생으로 가거나 내셔널리그의 울산 현대미포조선으로 갈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를 안겨줬다.


김영후가 먼저 고른 선택지는 성남이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당시 성남의 전력은 막강했다. 우성용, 모따 등 K리그 최고의 공격수들이 있었다. 그는 "처음엔 성남에 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면담을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성남에서 경기를 뛰지 못하는 것보다 내셔널리그에서 많은 경기를 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선택을 바꾼 계기를 설명했다.


미포조선의 유니폼을 입은 김영후는 최순호 감독의 지도 아래 첫 시즌부터 그야말로 내셔널리그를 '정복'했다. 2006시즌 리그 21경기에 나서 19골을 터뜨렸다. 이듬해에는 발목 부상으로 5개월을 쉬었음에도 11경기 7골의 기록을 남겼다. 2008시즌에는 26경기 30골이라는 경이로운 해를 보냈다. 특히 천안시청과의 경기에서는 1경기 7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통산 최다골, 최다 연속골, 한 경기 최다골 등 내셔널리그의 득점 관련 기록에는 모두 김영후 세 글자가 적혀있다.


하지만 첫 시즌부터 맹활약을 펼쳤음에도 프로 데뷔는 늦었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었다. 김영후는 "첫 시즌을 마친 뒤에는 해외 리그에 도전하려 했다. 일본 쪽으로 알아봤다. 당시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로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드래프트 전에 먼저 나를 원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팀도 딱히 없었다. 드래프트 시기와 일본으로 건너가는 시기가 맞물려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일본 도전을 택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두 번째 시즌은 미포조선의 K리그 진출 가능성이 대두하던 때였다. 당시 미포조선 선수들은 우승을 따내고 같이 K리그에 가자는 각오로 단결되어 있었다. 한 명도 드래프트에 지원하지 않았다. 김영후 역시 승격의 꿈을 품고 드래프트를 포기했으나 미포조선의 K리그 합류가 최종적으로 좌절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내셔널리그에서 세 시즌을 보낸 김영후는 2009년에야 K리그 무대를 밟게 됐다. 강원의 감독으로 부임한 최순호 감독의 선택을 받아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내셔널리그 괴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K리그에서도 통할 것으로 보는 시각과 이를 의심하는 시각이 공존했다.


답은 전자였다. 첫 시즌 13골을 몰아넣으며 화력을 뿜었다. 그는 "드래프트에서 더 큰 구단의 부름을 받았다면 그만큼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을 것 같다. 나를 잘 아는 최순호 감독님 밑에서 축구를 하게 된 것이 원동력"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활약은 김영후에게 K리그 신인상을 안겨줬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신성 유병수와의 경쟁 끝에 영예를 안았다. 그는 주목을 모았던 유병수와의 라이벌 구도에 관해 "솔직히 유병수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경기가 끝나면 유병수도 골을 넣었는지 꼭 확인하곤 했다. 말 그대로 선의의 경쟁이었던 것 같다"라고 답했다.


이어 "다만 나는 내셔널리그를 거쳤고 유병수는 대학 무대에서 바로 온 선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신인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내가 상을 타 미안한 마음이 있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2010 남아공 월드컵 시즌이 찾아왔다. 김영후에게는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은 시기다. "대표팀에 갔다 온 줄 아는 사람이 많다"라고 웃으며 운을 뗀 그는 "개인적으로 과거에 미련을 크게 두지 않는 편인데 한 번도 태극마크를 못단 것은 아직도 아쉽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정말 컨디션이 좋았다. 이 정도면 대표팀에 뽑힐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컸다. 하지만 부름을 받지 못했다"라고 아쉬워했다.


김영후는 유병수와 남아공 월드컵 전 두 시즌 동안 K리그에서 치열한 득점 경쟁을 펼쳤다. 그때 이들의 허정무호 발탁 가능성은 언론과 여론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김영후는 부름을 받지 못했다. 유병수도 2009년 6월 한 차례 소집됐던 것이 남아공 월드컵 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김영후는 아쉬움을 삼키면서도 "나는 페널티박스 안에서 득점 기회를 노리는 타입이었다. 많이 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감독님의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라고 성숙한 답을 내놨다.


2012년에는 경찰 축구단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다. 2013시즌 10골을 터뜨리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기대감 속에 강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돌아온 강원은 예전과 달랐다. 사장부터 감독, 스태프 등까지 모두 바뀌어있었다. 부상 후유증을 겪고 있어 축구에만 집중할 시간도 모자랐지만 외부 사정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결국 2014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다. 그는 "강원을 사랑했다. 연봉을 낮춰서라도 남고 싶었다. 하지만 구단의 방침은 확고했다. 쫓겨나다시피 떠났다. 당시 프런트 쪽에서 팬들에게 내가 높은 연봉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했다더라. 사실이 아니다. 난 연봉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강원과의 인연은 이렇게 끝났지만 김영후의 이름은 아직 강원의 역사 속에 살아있다. 김영후가 남긴 팀 최다골, 최다 도움,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은 강원이 1부리그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아쉬움 속에 강원을 떠난 그는 해외 이적을 알아봤다. K리그 몇 팀에서도 러브콜이 왔으나 강원이 아니면 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악수가 됐다. 그는 "해외에서 뛰다가 강원으로 돌아와 은퇴하고 싶었다. 당시 에이전트가 없다 보니 여러 에이전트가 해외 제안을 들고 왔다. 먼저 태국으로 가서 테스트를 봤는데 이적 시장이 끝날 때쯤에야 영입 불가를 통보하는 등 고생을 했다"라고 기억했다.


김영후는 인도네시아로 넘어가 페르세바야 입단을 타진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두 개로 쪼개져 있던 인도네시아 리그가 2014년 통합되는 과정에서 페르세바야가 통합 리그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김영후는 반년을 개인 운동으로 보내는 힘든 생활 끝에 후반기에야 중국 갑급리그 선전FC에 입단했다. 이임생 현 수원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팀이었다. 문제는 이임생 감독이 입단 한 달 후 팀을 떠났다는 점. 통역사 등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이 팀을 떠나면서 홀로 남겨졌다. 반 시즌을 외롭게 보냈지만 13경기 4골을 기록하며 선전을 강등에서 구하는 유종의 미를 거둔 후 중국을 떠났다.


그가 돌아온 곳은 안양이었다. 김영후는 "먼저 불러주는 팀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안양에 입단하게 됐다. 내셔널리그를 경험하신 이우형 감독님께서 좋게 봐주신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안양에서 한 시즌을 보낸 그는 이듬해 경주 한수원으로 이적하며 내셔널리그로 복귀했고 지난해에는 K3리그 청주CITY에 몸담았다. 이 시즌은 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이 됐다.


은퇴에 관해서는 "경주에서 후반기에 십자인대 부상을 입었다. 그때 처음 은퇴 결심을 했다. 그런데 친구인 권오규 감독이 청주에서 함께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렇게 청주에서 지도자 준비를 병행했고 지난해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라고 전했다.


2019년의 김영후는 어엿한 지도자가 됐다. 세종시에서 아이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초등학생 대상 보급반으로 시작했던 클럽은 최근 선수반도 신설했다. "선수보다 감독이 훨씬 힘들다"라며 운을 뗀 그는 "지도자로서 첫걸음은 아이들부터 가르치면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아이들 집중시키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라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애로사항을 전한 그는 "선수 시절엔 내 몸만 건사하면 됐다. 지금은 아니다. 높은 책임감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축구 뿐만 아니라 인성도 교육해야 한다. 쉽지는 않지만 좋은 선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라고 지론을 밝혔다.


향후 계획에 관해서는 "프로팀 지도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언젠가는 더 큰 무대로 가고 싶다. 그러나 미래 이야기다. 이곳에서 먼저 인정받고 싶다. 최소 5년, 길게는 10년까지는 이 일을 하고 싶다. 묵묵히 능력을 입증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된다면 나중에 자연스레 기회는 올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daeryeong@sportsseoul.com


사진ㅣ김대령기자, 스포츠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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