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윤소윤기자] '유도(柔道)' 부드러울 유. 길 도. '부드러운 길'이라는 뜻을 가진 스포츠다. 홀드를 이용해 상대방을 넘어뜨리며 승패를 겨루는 격한 무술경기지만 속뜻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이원희(38)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첫 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서 한판승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에 유도 열풍을 일으켰던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운동선수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한없이 부드러운 '반전의 사나이'였다.


여름이 막 시작할 무렵 명동에서 마주한 그는 현역 시절보다도 더 다부진 체격과 여전히 현역 선수 같은 아우라를 풍기며 등장했다. 그러나 이내 "저 생각보다 부드러운 남자예요"라는 가벼운 농담으로 딱딱했던 첫 만남을 단숨에 즐거운 대화 자리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대만 티우웬 시 국립체육대학교 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치며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고있는 이원희에게 '한판승의 사나이' 그 시작과 끝을 들어봤다.


◇ 골목대장, 아테네의 영웅이 되다.


이원희가 처음 도복을 입게 된 것은 '골목대장'이었던 그를 바르게 키우고자 했던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싸움을 되게 잘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태권도장에 보내셨죠. 처음 갔는데, 싸움하면 저한테 지던 애들이 거기 쪼르르 앉아있더라고요(웃음). 대련해도 제가 항상 이기니까 도전 의식이 없어져서 유도장으로 옮겼어요."


유도에 처음 재미를 붙이게 된 계기는 참 단순했지만 '이원희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처음 시작했을 땐 낙법만 배우니까 지겹더라고요. 대련하고 싶어서 초록색 띠 매고 앉아있던 여리여리한 형을 지목했어요. '김보섭'이라고 아직도 기억나네. 하하."


그는 '김보섭'과의 생애 첫 유도 대결에서 처참히 패배했으며, 이는 곧 '한판승의 사나이'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삐쩍 말라서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형한테 지고 나서 오기가 생겼죠. 유도가 힘만으로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이후 이원희는 유도명문 보성중, 보성고를 거쳐 용인대로 진학했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상위권에 오르며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3년, 스물셋의 이원희는 오사카 유도 세계선수권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하며 화려한 시니어 데뷔를 알렸다.


66kg급으로 시작했던 그는 10kg 정도를 증량한 뒤 당시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체급인 73kg으로 선수 등록을 마치며 운명의 대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긴장도 많이 되고 부담도 많이 됐어요. 모든 스포츠인이 꿈꾸는 자리에 제가 선거니까. 앞선 대회는 오히려 동기부여가 되더라고요. 금메달을 꼭 따야겠다는."


올림픽 당시 이원희가 유일하게 한판승으로 승리하지 못한 경기는 벨라루스의 라쿠로프와의 첫 경기 뿐이었다. "제일 까다로웠어요. 힘도 좋고. 선배들은 그 선수 앞에서 발도 못 디딘 적도 있었죠."


그러나 이원희는 가장 큰 고비였던 첫 경기에서 유효승을 차지하며 금메달의 불씨를 댕겼다. 이후 미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유도 간판스타들과의 모든 경기를 한판승으로 승리하며 대한민국의 유도 영웅으로 재탄생했다.


"올림픽 73kg급이 재밌었던 게 세계선수권, 유럽선수권 금메달리스트들의 총출동이었어요. 보는 분들은 재미있으셨겠지만, 저한테는 죽을 것 같았던 경기의 연속이었죠.(웃음)."


◇ 한국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 영광 뒤의 상처


"의사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이봉주 선수 금메달이랑 제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라고."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에 이어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까지 목에 건 그의 질주는 올림픽에서 멈추지 않았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획득한다면 대한민국 유도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메달을 이미 목에 건 상황에서 다시 초석을 다지기는 쉽지 않았다. "올림픽 끝나고 많이 놀았어요. 그러다 선발전 탈락하고 정신 차렸던 것 같아요. 누구한테 졌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처참함만 기억이 나네요. 하하. 6등을 했는데 그런 등수도 처음이었고, 저 자신이 싫어지더라고요."


그런 그를 다잡은 것은 코치도, 감독도 아닌 바로 이원희 자신이었다. "'너는 그래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신 차리고 다시 운동을 하는 게 정말 너무 힘들었지만, 이 악물고 했죠."


'올림픽을 씹어 먹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계 무대를 휩쓸어왔던 그였지만, 발목을 잡은 것은 오히려 국내 선발전이었다. 선발전 내내 2등을 했던 그는 최종 선발전,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당시 그의 마지막 상대는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재범이었다.


"선발전 결승 내내 재범이하고 경기했어요. 걔가 진짜 사람 진 빼는 스타일로 플레이하거든요. 재범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유도 인생 중에 제일 힘들었던 시합이 바로 그 선발전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숨통 끊어지는 줄 알았죠."


후배 김재범과의 맞대결에서 이원희는 목숨을 내건(?) 혈투 끝에 승리를 차지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역시 아시아 최고를 증명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마침내 한국 최초로 유도 그랜드슬램을 이룬 선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광 뒤에는 뼈를 깎는 고통이 함께했다. "도하에서 금메달 땄을 당시 사실 발목이 되게 아팠어요. 아시안게임 끝나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까 인대가 끊어지고, 양쪽 뼈가 다 썩어있더라고요. 소염제 먹으면서 참고 했던 거죠. 그때 제 발목 수술해주셨던 분이 저한테 아시안게임 못 나간다고 하셨었어요. 경기 후에 하셨던 말씀이 '이봉주랑 네 금메달이 가장 미스터리다' 였어요. 하하."


이후 이원희는 독일로 건너가 골반 뼈와 인대를 이식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선발전에 나섰지만, 재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선수 생활을 마쳤다. 화려했던 이원희의 국가대표 시절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우리동네 예체능', 유도의 부흥을 이끌다(feat. 조준호)


"준호는 올림픽이 아니라 티비에 나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하."


잠깐의 공백을 가졌던 이원희를 다시 만난 곳은 도장이 아닌 브라운관이었다. 2015년 그는 KBS 예능프로그램 '우리동네 예체능-유도편'에 코치로 출연하며 반가운 근황을 알렸다.


"원래는 안 하려고 했어요. 출연 제안 연락을 받았을 때 옆에 조준호 선수가 있어서 '너 할래?'라고 했더니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방송국 쪽에서는 저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거절을 계속하니까 대한유도회 전무님께서 직접 전화하셔서 유도 홍보차원에서 꼭 출연하라고 하셨죠."


당시 남자유도 대표팀 코치였던 조준호와 함께 출연하게 된 이원희는 걱정과는 다르게 완벽한 코치 기량을 뽐내며 프로그램의 재미를 배로 더했다. 재간둥이 조준호 역시 열혈 방송인으로 활약해 프로그램의 흥행에 힘을 보탰다. "준호는 촬영 전날 밤에 콘티를 짜더라고요(웃음). '너라도 열심히 하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했고 덕분에 방송도 잘 됐어요. 준호가 큰 공을 세웠죠.”


'우리동네 예체능' 방송은 유도의 부흥에 제대로 이바지했다. "프로그램 이후로 유도 인구가 엄청 늘었어요. 체육관도 늘고. 재미있게 홍보가 잘 돼서 다행이었어요. 짜고 한 거 한 순간도 없는데, 경기도 극적으로 잘 나왔고요." 이후 이원희는 프로그램의 흥행을 뒤로하고 국가대표 '코치'로 다시 한 번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이었다.


◇ 선수에서 국가대표 코치로…”차라리 내가 뛰고 싶었다"


"결과가 없으면 '젊음'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보상받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최선을 다했어요."


2016년 이원희는 여자 대표팀을 이끌고 브라질 리우행 비행기에 올랐다. 선수로서 수없이 서본 국제무대였지만 코치라는 막중한 책임을 등에 업고 나선 올림픽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당시 여자대표팀은 올림픽 이전 각종 세계무대를 휩쓸며 좋은 성적을 냈음에도, 정작 올림픽에선 은메달 한 개에 그치며 아쉬운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원희에게도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성적 부진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어요. 후회가 많이 되죠. 근데 후회가 남아야 발전도 하는 거니까."


자신의 선수시절을 되돌아보던 그는 후배들을 위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국가대표는 태극마크를 단 사람들이잖아요. 자유시간 이런 건 정말 쓸데 없는 사치라고 생각해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면 그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죠. 그런 마인드를 심어주는 게 참 힘들었고, 죽도록 열심히 하도록 끌어주는 것도 어려웠죠. 차라리 제가 운동하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태극마크를 내려 놓은 지 10년도 더 흘렀지만 그에게 '국가'와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슴 벅찬 이름이었다. "힘들었지만, 국가가 부른다면 언제든 다시 갈 거예요. 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광'을 위해서요."


수도 없이 오갔던 태릉 선수촌 역시 여전히 그를 가슴 뛰게 하는 장소였다. "지금도 선수촌 가면 코치인데도 긴장이 많이 돼요. 올림픽 오륜기만 봐도 가슴이 뛰고. 제가 선수일 때도 그런 마음으로 진지하게 임했으니까, 지금도 그런 게 강해요. 자부심이 있고, 울컥하고. 올림픽과 태극마크는 제 인생에 있어서 언제나 그런 의미죠."


◇ ‘유도황제’의 마지막 꿈 “받았던 사랑 돌려주고파”


"하루하루 죽도록 열심히 살고 싶어요. 그렇지 않게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면서."


‘유도’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다 이뤄낸 그였기에, 앞으로의 목표가 더욱 궁금해졌다. “저는 돈을 버는 이유가 제가 은혜를 입었고, 고마웠던 분들에게 잘해주고 싶어서예요. 요즘 들어서 생긴 목표는...”


잠깐의 고민을 하던 그는 인터뷰 내내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저희 아이가 커 가는 과정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어요. 조그마한 게 자기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다 알더라고요. 보면서 고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부모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얼마전 SBS ’영재발굴단’에 출연해 가슴 아픈 사연으로 눈물과 감동을 안겼던 철원 유도 꿈나무 세쌍둥이의 방송을 봤다던 그는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기술도 알려주고, 친삼촌처럼 알려주고 싶어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인터뷰 끝자락, 아내와 딸의 이야기를 꺼낼 때는 ‘딸바보’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줬다. “그저께 딸 돌잔치를 했어요. 태명이 ‘한판이’였는데 돌잡이 때 유도복이랑 돈을 같이 잡더라고요.(웃음). 아내랑 저는 유도 시킬 생각이 있어요. 힘든 세상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요.”


가족 얘기를 이어가던 중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에 이원희는 “인터뷰하고 있어요”라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선수시절의 카리스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는 진짜 우리 와이프를 존경해요. 진짜 멋있는 여자예요. 올바르고 정직하고, 제가 배우는 게 많아요. 본인이 맡은 선수들한테 정말 잘하고, 어디든지 달려가고.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죠. 앞으로도 저흰 그렇게 베풀면서, 또 열심히 살아가려고요.”


금메달이라는 찬란한 영광을 얻기 위해 수백번도 더 쓰러지고 무너졌지만,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다. 태극마크를 내려놓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원희의 삶의 원동력은 여전히 같았다. 그렇기에 도복을 입지 않은 그의 인생도, 도장 위에 서 있지 않은 이원희의 삶도, 우리는 응원할 수밖에 없다.


younwy@sportsseoul.com


사진 | 윤소윤기자 younwy@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DB, KBS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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