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히딩크의 황태자'라는 수식어는 꽤 많은 선수에게 돌아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당시에는 송종국이 이 별칭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로 꼽혔다. 지금은 월드컵 이후 히딩크 감독의 지도 아래 월드 스타로 성장한 박지성이 '히딩크의 황태자'로 대중의 뇌리에 남아있다.


하지만 월드컵 이전까지 이 별명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심재원이다. 1998년 연세대학교 재학생 신분으로 처음 태극마크를 단 심재원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꾸준히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총애를 받았다.


독일에서의 생활부터 아쉬움이 짙게 남은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까지. 지금은 축구계를 떠나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심재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럽 진출 수비수, 홍정호 이전에 심재원 있었다


심재원은 빠른 발을 주무기로 한 수비수였다. 여기엔 배경이 있었다.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뛰어난 육상 선수였다. 심재원은 "어릴 때는 육상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전국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대회 후에 다른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님이 집에까지 찾아오셔서 축구를 하자고 권했다"라고 밝혔다.


그렇게 축구를 시작한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1997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청소년 선수권대회에 출전했고 연세대 3학년이 된 이듬해 1998년에는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같은 해 열린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했고 2000년에 열린 시드니 올림픽과 아시안컵까지 나갈 수 있는 모든 대회에 모두 참가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다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모두 나갔는데도 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8강에서 '태국 쇼크'에 무너졌고, 올림픽에서는 조별리그에서 2승을 거두고도 탈락하는 아픔을 맛봤다.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사비 등에게 골을 내주면서 0-3으로 패한 것이 컸다.


심재원은 "첫 경기부터 잘했어야 했는데 정신을 조금 늦게 차렸던 것 같다"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스페인은 확실히 위기 관리 능력이 좋았다. 수세에 몰렸을 때도 뒤집고 치고 나가는 힘이 대단했다. '이래서 무적함대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회상했다.


2000년은 그가 프로 무대에 발을 디딘 해이기도 했다. 드래프트에서 부산 아이콘스(현재 부산 아이파크)에 1순위 지명을 받으면서 부산에 입단했다. 프로 2년차인 2001년에는 깜짝 이적이 이뤄졌다. 독일 분데스리가 2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수비수로는 반 시즌 먼저 오스트리아 무대를 밟은 강철에 이은 두 번째 유럽 진출이었다.


그는 "2000년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당시 독일에서 뛰던 이란의 알리 다에이를 전담 마크했는데 그때 경기력이 괜찮았다. 그 이후 프랑크푸르트 입단 테스트 제의가 왔다"라고 그때를 기억했다. 부산은 일단 테스트를 허락해줬다. 심재원은 "아무도 합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 아닐까"라고 웃은 후 "김호곤 감독님도 '바람도 쐬고 좋은 경험 하고 와라' 하며 보내주셨다"라고 이야기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일로 향한 그는 10일간의 입단 테스트 기간 전력을 다해 임했고 결국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임대 신분으로 시작한 독일 생활. 처음에는 유럽 선수들의 텃세 속에 살아남아야 했다. 인종차별도 있었다. 심재원은 "동료로서 대우도 제대로 안 해줬다. 훈련이나 경기 때 패스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일부러 거칠게 부딪혔다. 마늘 냄새가 난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고 팀원 모두가 이태리 식당에 가는데 나만 출입을 제지당한 적도 있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굳은 의지로 이를 이겨냈다. 그는 "꼭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경기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뛰었고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해 불고기나 김치를 주기도 했다. 그러자 3경기 만에 동료로 인정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심재원은 2001~2002 시즌 리그 기준 19경기에 나섰다. 중반 이후로는 주전에서 밀리는 모양새였지만 아시아에서 온 어린 선수로서는 괄목할 만한 기록이었다. 프랑크푸르트도 완전 영입을 원했다. 부산은 난색을 보였다. 그는 "2002 시즌 부산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에 높은 이적료를 요구했다. 사실상 보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라며 "여기에 더해 군대 문제도 있고 해서 부산으로 돌아오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월드컵 무대 밟지 못한 히딩크의 황태자


이 2002년은 한일 월드컵의 해이기도 했다. 심재원에게는 아쉬운 시간이다. 그는 "히딩크 감독님이 오신 후 1기부터 10기까지 모두 뽑혔다. 감독님과 사이도 좋았다. 독일에서 뛸 때도 베어백 코치가 직접 독일까지 와서 몸 상태를 체크하고 가곤 했다"라고 말문을 뗐다. 하지만 유럽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대표팀 소집이 매우 잦았다. 소집 훈련도 많았고 월드컵경기장이 개장할 때마다 개장 경기를 했다. 프랑크푸르트가 잦은 소집을 탐탁지 않게 여겨 갈등이 생겼다. 경기 출전에도 영향이 갔다"라며 "그래서 대표팀 차출을 조금 줄여달라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문제로 심재원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대표팀 훈련에 자주 참가하지 못했다. 이는 히딩크의 황태자라 불리던 그를 23인 최종 엔트리에서 낙마시키는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히딩크 감독은 심재원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월드컵 개막을 몇 주 앞둔 5월 '23+1'의 형식으로 그를 대표팀에 불러들였다. 부상자나 전술적 이유 등 변수가 생기면 심재원을 등록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심재원은 합류 수일 만에 돌연 자진 하차했다.


심재원은 이 선택이 가장 후회된다고 털어놨다. 그는 "팀 재계약에 신경을 쓰고 있던 시점이었다. 대표팀에서 엔트리 조정 기간에 불러서 일단 급하게 합류했다. 그런데 합류 후 연습 경기를 두 차례 했는데 기회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힘들어 감독님께 따로 면담을 요청해 자진 하차했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일을 기점으로 선수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성장을 한 것 같다"라고 속마음을 전했다.


▲타의로 떠난 K리그, 그리고 은퇴 "지금도 아쉽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는 절치부심해 부산에서 꾸준히 활약을 이어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광주 상무에서 뛰며 군 복무를 한 기간 외에는 2008년까지 계속 부산에서 뛰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들면서 시련을 겪었다. 2008 시즌 주전 경쟁에서 밀린 그는 계약 만료 후 이적을 모색했다. 이번에도 이적료가 발목을 잡았다.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높은 이적료가 발생하는 K리그 FA 로컬룰이 문제였다.


심재원은 "고(故) 이안 포터필드 감독님부터 앤디 에글리 감독님까지 외국인 감독님들 아래에서는 꾸준히 뛰었다. 그런데 이후 새 감독님이 오시면서 팀 플랜에서 제외됐다"라고 회상했다. 프로 선수로서 주전에서 밀리는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제도에 발목이 잡혀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울산 등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이적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심재원은 해외 이적을 노렸다. 같은 처지에 놓였던 김은중과 함께 중국 창사 진더에 입단했다. 그는 "일본과 중국에서 입단 제의가 와서 창사를 택했다. 선수 생활 막바지라 금액적인 부분을 따질 수 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중국 생활을 마친 그는 K리그 복귀를 타진했다.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부산에 줘야 하는 FA 이적료는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돌아올 때도 유효했다. 그는 "그 나이 선수에게 높은 이적료를 쓸 팀은 없다. 사실상 은퇴하라는 말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서운한 부분이 있다"라며 아픈 기억을 되짚었다.


결국 심재원은 창사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도 실업리그인 내셔널리그 강릉시청에서 반 시즌을 뛴 뒤 은퇴를 택했다. 그는 "당시 강릉에서 뛰던 정유석 코치의 제안을 받고 강릉에 입단했다. 잘하는 팀이었는데 상반기 성적이 안 좋았다. 내가 입단한 후 성적이 반등해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라며 "팀에서 재계약을 하자고 했는데 팀과 내가 우승이라는 좋은 기억을 가진 만큼 그대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었다"라고 은퇴 배경을 설명했다.


▲"축구로 인연 맺은 부산, 앞으로도 도움 되고파"


은퇴 후 심재원은 축구계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지도자 생각은 아예 없었다"라며 은퇴 전부터 축구계에는 선수로서만 이름을 남길 계획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지금도 없다. 선수로서 많은 경험을 했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 축구계에 더 남고 싶은 미련은 없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심재원은 부산경남 지역방송 KNN에서 스포츠 해설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또 관광 및 요식업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고 부산 지역의 한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재능기부 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지역방송에 출연하거나 강의를 하는 등 부산 지역에서는 아직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전국 방송 등으로 진출할 생각은 없다. 부산 지역사회에 남아 계속 공헌하고 싶다"라며 앞으로도 '부산맨'으로 남겠다는 계획을 전했다.


daeryeong@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DB, 심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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