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 루지 개척자' 성은령 "회사원 변신…억지로 살 안 찌워도 돼 좋아요"[리와人드]
    • 입력2019-06-13 11:00
    • 수정2019-06-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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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글·사진 김대령기자]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가시덤불로 덮여 보이지 않는 길을 스스로 헤치며 길을 찾고, 또 만들어야 한다. 베이고 찔려 피가 나고 땀이 흐르지만 알아주는 이도 없다.


어깨에 짊어진 짐도 너무도 무겁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지만 갈림길이 나왔을 때 내가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내 뒤를 따르는 이들의 운명도 결정된다. 나의 잘못된 결정이 뒷사람들을 낙오시킬 수도 있다.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누른다.


하지만 역사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선구자가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은 곧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평범한 체대생, 국가대표가 되다


성은령은 한국 여자 루지의 길을 개척한 선수다. 소치 동계올림픽에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루지 싱글 종목에 참가했다. 한국은 1998년 나가노 대회부터 2010년 벤쿠버 대회까지는 남자 싱글만 출전해 왔다. 완주에 만족했던 소치에서와는 달리 평창에서는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입증하면서 한국 루지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금은 은퇴를 선언하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변신한 성은령을 수원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은령은 성인이 되고 나서야 루지를 시작했다. 다른 종목에서 전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체대생이었다. 그는 "일단 스포츠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 체대에 진학하게 됐어요. 그런데 입시 체육이 워낙 힘들잖아요. 그래서 입학한 후에는 일단 놀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어요. 루지는 전혀 생각도 안 했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루지 선수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고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만 해도 '루지 선수가 꼭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단 선발전에 갔어요. '꼭 이 경기에서 이기고야 말겠다'라는 열정 넘치는 마음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대였죠. 선발전을 앞두고 친구에게 '나 안 할 거니까 네가 가서 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도전 정신이 성은령을 붙들었다. 그는 "거의 일주일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이잖아요. 그래서 고민이 깊었어요. 하지만 도전을 좋아하는 저의 성격을 이겨내진 못했던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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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4월 소치 동계올림픽을 마친 성은령이 2014 프로야구 LG-넥센전에 앞서 시구를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극적으로 나선 소치 올림픽. 그곳에 이름 석 자를 새기다


루지 선수가 되긴 했지만 환경은 당연하게도 열악했다. 올림픽으로 주목받은 적도 없는 종목이라 스폰서나 지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성은령은 "그때 코치님만 한 분이 계셨어요. 코치님이 선수 지도는 물론 영수증 처리 등 행정적인 일까지 다 했죠"라며 힘든 시절을 떠올렸다.


장비 문제는 더 크게 다가왔다. 해외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그 나라 어린이들이 타는 썰매를 빌려서 타야 했다. 그는 "아시겠지만 썰매 종목이 장비가 중요하거든요. 내 몸에 꼭 맞는 장비로 꾸준히 감을 익히며 타야 하죠. 그런데 매번 다른 썰매를 타니 당연히 매 대회에 나설 때마다 사이즈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죠. 한번은 대회 전날까지 썰매가 모두 예약이 되어있어서 대회 당일에야 내가 탈 썰매를 처음 타보기도 했어요. 실력이 크게 늘 수가 없었어요"라고 전했다.


겸손한 말과는 달리 성은령은 조용하지만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2011년 일본 나가노에 열린 루지 아시안컵 주니어부문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3년에는 계주에서 기록을 세웠다. 2013~2014 월드컵 3차 대회 팀 계주의 일원으로 참가해 한국 썰매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8위에 올랐다.


이 기록은 나비효과가 됐다. 계주 부문에서 올린 성적은 올림픽에 나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계주에 출전하려면 루지 4종목에서 모두 올림픽 출전 선수를 배출해야 했다. 남자 1인승을 제외하면 출전권 획득이 사실상 힘들었던 한국은 자연스레 계주 출전마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세계루지연맹은 한국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국제대회 전 종목에 선수를 내보내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전 종목 출전을 허가했다.


당시 대한루지경기연맹에 등록된 선수는 30명 전후. 사실상 소치를 위해 뛰던 선수들을 제외하면 활동 선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황무지에서 새싹을 틔운 셈이었다.


성은령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올림픽으로 가는 길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남아있었다.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자리는 단 한 자리. 동고동락한 동료 최은주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최은주는 2013년 12월 열린 아시안컵에서 성은령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바 있었다.


성은령은 "우리 중 한 명만 나갈 수 있으니 싫든 좋든 경쟁을 해야 했어요. 게다가 점수 산정 방식이 달라진다거나 레이스를 한 번 더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선발 방식이 계속 바뀌었어요. 둘 다 정말 예민해졌죠. 서로 이야기하는 횟수도 줄었어요"라고 불꽃이 튀었던 경쟁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두 선수는 모두 프로였다. 잠시 소원해졌던 두 선수는 비 온 뒤 땅이 굳듯 다시 친한 사이로 돌아왔다. 그는 "소치가 끝나고 1, 2년이 지났을까. 그즈음에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어요.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소치에서는 31명 중 29위를 기록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성적이었겠지만 한국 여자 루지사(史)의 첫 페이지를 쓰는 순간이었다. 성은령은 만족했다. 그는 "언론에는 '몇 위'라는 성적으로만 보도됐지만 나는 부딪히지 않고 끝까지 탔다는 것이 스스로가 대견했어요"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비록 상위권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소치는 대중에게 루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성은령도 이름을 알렸지만 개인적인 명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조명을 받아서 행복하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다만 소치 이후에 훈련 환경이 좋아지고 스폰서가 생기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그 점이 좋았죠"라고 이야기했다.


소치 올림픽이 꿈처럼 지나간 후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은령은 은퇴를 잠시 고민했다. 그는 "사실 은퇴를 하려는 생각도 있었어요. 체력적으로 힘들고 몸도 이곳저곳 계속 아프고…. 누가 먼저 길을 닦아 놓은 것도 아니다 보니 모든 게 막연했어요"라며 정신적으로 흔들렸던 이유를 전했다. 그러나 어느새 수년을 동고동락한 썰매는 다시 성은령을 트랙 위로 이끌었다. 그는 "결국은 다시 썰매 위에 오르고 싶더라고요. 특히 실력이 느는 게 느껴지니 그 성취감이 썰매를 놓지 못하게 했어요"라고 마음을 다잡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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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령이 지난 2017년 11월 루지 남자 국가대표 김동현과 함께 인터뷰한 뒤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하고 있다. 태릉 | 김용일기자 kyi0486@sportsseoul.com

▲성은령의 마지막 질주가 된 평창 동계올림픽


그렇게 4년이 흘러 평창 올림픽의 시간이 왔다. 국내에서 열리는 올림픽인 만큼 루지 종목에도 투자가 이뤄졌다. 성은령은 "해외 훈련도 늘어났고 코치도 많아졌어요. 특히 트랙이 생겼다는 게 정말 큰 차이였어요. 동계 종목은 전용 경기장이 없으면 실력 향상이 힘들거든요. 큰 도움이 됐죠"라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평창 올림픽을 앞둔 2017년 9월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수술을 받으면 재활에만 수개월이 걸리는 부상이었다. 그러나 성은령은 수술을 미루고 고장난 다리를 안고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그는 "사실 올림픽에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바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평생 힘들다고 했거든요. 수술은 평창 끝나고 했어요"라고 밝혔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준 건 '올림픽 정신'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선 10년 이상 썰매를 타고도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는 선수가 수두룩하거든요. 그런 걸 생각하면 부담감이 컸죠. 그런데 문득 '올림픽 정신'이라는 게 떠올랐어요. 올림픽은 경쟁이 아니라 화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잖아요. 경기를 즐기며 최선을 다해 완주만 해내자는 생각을 하니 부담감을 한결 덜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성은령이 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은 18위. 메달권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온전하지 않은 몸을 썰매 위에 뉘이고 완주해 박수를 받았다. 그의 말대로 최선을 다한, 후회없는 질주였다.


평창의 루지 트랙은 성은령이 탄 마지막 트랙이 됐다. 성은령은 대회가 끝난 후 썰매를 내려놓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그는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힘들어서 스스로 데드라인을 정했어요. '조금 더 해볼까'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내가 다음 올림픽을 바라보면 여기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데 그 성적의 상승폭이 클 것 같지가 않았어요. 다음 올림픽이면 저도 30대거든요. 주니어 선수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죠"라며 은퇴를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성적에 관한 후회는 없을까. 성은령은 "'성적이 조금 더 좋았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물론 있죠. 그런데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라는 생각은 없어요. 정말 열심히는 했거든요"라고 답하며 웃었다.


선수 생활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점에 대한 질문에는 바로 답이 나왔다. 그는 "체중 조절이 정말 힘들었어요"라며 "몸을 싣고 질주하는 썰매 종목은 어느정도 몸무게를 불려야 유리하거든요. 평창 올림픽 전에는 코치님이 수치를 제시하면서 몸무게를 이 정도로 만들지 않으면 썰매를 못타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어요. 억지로라도 체중을 불려야 했죠. 살이 찌는 체질이 아닌데 이걸 억지로 바꾸려니까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기억했다.


▲또 다른 도전 '회사원 변신'


사회로 나온 성은령은 지난 2월 의외의 근황을 전했다. 한 스포츠 마케팅 회사에 인턴 사원으로 취업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성은령은 "지금은 정직원 됐어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지도자가 아닌 회사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도 선수 시절 빛났던 도전 정신과 패기가 진가를 발휘했다. "선수 때 은퇴지원센터에서 성격 검사를 해봤는데 그때 마케팅 직무에 적합하다는 결과를 받았어요. 그러다가 은퇴 후 채용설명회에서 우연히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만났어요. 기업관이 마음에 들어서 연락처를 받고 제가 먼저 '이 회사에 다니고 싶다'라고 연락했어요. 그렇게 기회를 얻었고 합격 통보를 받았죠"라고 답했다.


오랜 기간 운동만 하던 선수들은 회사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는 "운동은 열심히 하면 그만큼 경기 때 결과가 수치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회사에서 일하는 건 다르니 그 부분이 힘들죠. 수치를 통해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동기부여를 했는데 업무라는 게 수치가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라면서도 "내가 뭔가를 창의적으로 기획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를 실행해 옮기는 과정이 즐거워요"라고 애사심(?)을 뽐냈다. "살도 억지로 안 찌워도 되고"라는 말도 덧붙이며 웃기도 했다.


지금은 얼음과 떨어져 살고 있는 성은령. 그가 이 '얼음길'을 걷고 있는, 그리고 걷게될 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은 뭘까. 그는 "이 질문 할 것 같았어요"라며 웃었다. 이어 "그래서 내가 선배가 있었다면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 생각해봤어요. 생각해보면 계속 걷다 보니 길이 생긴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게 루지와 비슷한 것 같아요. 트랙에 계속 굴곡이 있고 이게 선수를 괴롭히지만 결국 그 길은 결승선으로 이어져 있거든요"라고 성숙한 답을 내놨다.


이어 "루지라는 종목을 보면 누워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안에서 선수들은 처절하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생각해도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그 노력, 제가 알잖아요"라며 후배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daeryeo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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