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이 오는 8일 프랑스에서 개막하는 2019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월드컵에 출격한다. 지난 대회에 이은 2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다. 지소연 이민아 등 해외파들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대회에 이어 다시 한 번 16강 진출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이번 대회는 한국 여자축구의 세 번째 월드컵 무대다. 첫 월드컵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여자월드컵, 넓은 분류로 '여자축구 1세대'로 불리는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대회였다. 여자축구대표팀의 태동기로 꼽히는 1990년대 축구계를 누빈 이들은 투자도, 관심도 부족했던 척박한 환경 속에 묵묵히 길을 냈다. 모든 것이 최초였다.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피와 땀이 서린 길을 현재 후배들이 걷고 있다.


송주희(42)는 유영실 이명화 등과 함께 그 중심에 있는 선수였다. 현재 화천KSPO의 코치로 현장을 누비고 있는 그를 국민체육진흥공단 훈련장에서 만났다.


1990년대 여자축구계를 누빈 선수 중에는 다른 종목에서 전향한 선수가 많았다. 송주희는 처음부터 축구의 길을 걸어온 흔치 않은 선수였다. 그는 "아버지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셨어요. 당시 초창기 프로축구팀 리저브 선수들 이름도 다 외우셨어요. 지금도 유럽 축구 선수들까지 다 꿰고 계실 정도예요. 그런 아버지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죠"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송주희는 당시 서울에서 유일하게 여자축구부가 있던 창덕여중에 진학했다. 그리고 서정호 감독이 이끌던 위례상고에서 꽃을 피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단했을 땐 잘하는 선수도, 눈에 띄는 선수도 아니었어요. 1학년 때는 팀에서 네 번째 공격수였어요. 세 명이 다쳐야 제가 나갈 수 있는 거죠"라고 이야기했다. 송주희는 이 갭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제가 부족한데 열심히 뛰니 선배들이 좋게 봐준 것 같아요. 제게 따로 나머지 훈련도 시켜줬어요. 서 감독님도 저를 좋게 봐주셔서 잘 키워주셨고 그렇게 기량이 점점 올라왔죠"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노력은 결실로 이어졌다. 학교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자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그때는 상비군을 거쳤다가 대표팀으로 갔어요. 저는 기량이 느는데도 상비군에 뽑히지 않아서 불안했어요. 그런데 서 감독님이 '송주희는 상비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표팀으로 간다'라는 이야기를 한 다리 건너 듣고 제게 귀띔해주셨어요. 얼마 후 그 말대로 바로 대표팀으로 갔어요. 이례적인 일이었죠."


엄연한 대표팀 선수가 된 송주희는 경희대에 진학했다. 경희대는 당시 여자축구부를 두고 있는 유일한 서울 4년제 대학교였다. "축구를 시작할 땐 이화여대나 숙명여대가 목표였어요. 마냥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 교사가 되고 싶었죠. 대학교를 갈 때가 되니 이대와 숙대는 축구부가 없어진 상태였어요. 다행히 경희대에 진학하게 됐죠."


경희대 소속으로 대표팀을 오가며 활약한 그는 졸업 후 숭민 원더스에 입단했다. 학생이 아닌 어엿한 정식 선수가 됐지만 기쁨보다 먼저 든 감정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송주희는 "당시 실업팀이 INI 스틸(현 인천 현대제철), 헤브론 두 개밖에 없었어요. 여기에 숭민 원더스가 창단하면서 세 팀이 됐죠"라며 "그때는 정말 살아남기 위해 생존본능으로 축구를 했던 것 같아요. 여기에 우리 세대가 개척자로서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더해졌죠. 그래서 팀을 찾았을 때 '꿈에 그리던 선수가 됐다'라는 생각보다는 '살아남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라고 밝혔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번번이 '살아남은' 선수들의 발목까지 잡았다. 기대를 받으며 창단한 숭민은 찜찜한 여러 뒷이야기를 남긴 채 창단 3년 차인 2002년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선수들은 갈곳을 잃었다.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송주희는 다행히 인천 현대제철에 입단했으나 해체를 전후로 많은 선수가 고통을 겪어야 했다.


볕들날은 찾아왔다. 대표팀이 2003년 미국에서 열리는 여자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첫 쾌거였다. 진출 과정도 기적 같았다. 출전권이 걸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선수권대회 3, 4위전에서 일본에 1-0 승리를 거두면서 3위까지 주어지는 월드컵 직행 티켓을 따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은 여자축구의 강호였다. 월드컵 출전을 단 한 차례도 놓치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과의 격차는 지금보다 더 컸다.


송주희는 "그때는 월드컵에 대한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그 경기에 모든 것을 건 느낌이었죠. 그 경기만 이긴다면 축구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는 것만 같았어요"라고 설명했다. 경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일본은 전술로 움직였고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였어요. 우리는 투지로 뛰었고요. 경기 막판에는 양쪽 다리에 모두 쥐가 났어요. 상대 선수는커녕 동료 선수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공만 오면 서로 '막아'라고 소리치며 난리가 났었어요"라며 "경기가 끝나고 모두 부둥켜안고 울었죠"라고 기억을 되짚었다.


송주희(왼쪽 아래)가 유영실(오른쪽 아래)과 대표팀 훈련에 임하고 있다. 여자축구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두 선수는 지금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그렇게 여자대표팀은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타이밍도 좋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때여서 국민적인 관심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스폰서도 생겼다. 송주희는 "'스폰서 업체에서 협찬을 받는다' 라는 걸 처음 경험했어요. 그때야 처음으로 '내가 선수로서 상업적인 가치가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죠"라고 웃었다.

당시 여자대표팀은 국제 무대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유럽이나 남미의 선수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투지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브라질, 프랑스, 노르웨이를 상대로 3패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송주희는 "브라질전에는 초반엔 할 만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내 밀렸어요. TV에서 보던 브라질 남자 선수들처럼 밀고 들어오는데 마치 공이 발에 붙어있는 것 같았어요. 중원에서, 공격 진영에서 전술적으로 약속도 잘되어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이어 "신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차이가 많이 났어요. 우리가 두 발을 뛰는 동안 상대는 한 발을 뛰는데도 움직임은 더 효율적이었죠"라며 "특히 '여유'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어요. 공을 가졌을 때 그 여유가 '우리는 너희보다 잘하는 팀과도 많이 해봤어'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그 기세에 위축돼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못 펼쳤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경기 외적으로 느낀 것들은 더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몇만 명의 관중이 모인 곳에서 축구를 해봤어요.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공이 오는 게 무서울 정도로요." 외국 선수들이 남편, 아이들과 함께 이동하며 훈련과 경기에 임하는 것 역시 '여자 선수에게 결혼은 곧 은퇴'라는 공식이 유효하던 당시 한국 선수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송주희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때 '우리는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 편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에 숙소에 에어컨도 거의 안 틀고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했어요. 그런데 당시 숙소를 노르웨이 선수단과 같이 썼거든요. 그 선수들은 우리가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동안 잔디밭에 누워 태닝을 즐기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축구를 곧 생존으로 여겨온 송주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들은 축구를 즐겼고 우리는 경기로만 대했어요. 그 부분을 생각하면 질 수밖에 없던 경기였던 것 같아요"라고 정리했다.

월드컵을 경험한 송주희가 선수로서 여자축구계에 남긴 업적은 하나 더 있다. 2009년 K리그 신인왕 출신 양현정과 화촉을 밝힌 그는 결혼 후에도 WK리그 무대를 누비며 활약을 펼쳤다. 불과 10년 전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 축구계에서 결혼은 곧 은퇴를 뜻했기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WK리그의 유일한 기혼 선수였고 당연하게도 첫 사례였다. 그는 "지금 화천의 강재순 감독님이 그때 일화의 감독님이셨어요. 감독님께서 "결혼 후에도 네가 괜찮다면 하자"라고 말해주셨어요. 어떻게 보면 저보다 더 열려있으셨죠. 그렇게 한 시즌 동안 기혼 선수로서 뛰었어요"라고 밝혔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전향했다. 이 역시 도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여성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혼 후에는 대부분 현장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여성 지도자에 대한 편견도 한몫했다. 그러나 송주희는 은퇴를 선언하고 사실상 곧바로 지도자 생활에 투신했다. 그리고 10년이 가까운 기간 동안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가며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저는 사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선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한국 여자축구에, 후배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라며 "그래서 선수 시절은 물론 지금도 항상 '내가 선례가 되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현장에서 뛰고 있어요"라고 축구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미래에는 '감독 송주희'를 꿈꾸며 휴가 때 자주 일본을 찾아 일본의 여자축구를 공부한다는 말에서도 애정과 열정이 말뿐만이 아님이 느껴졌다.

이번 월드컵에 나서는 후배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도 보냈다. "월드컵은 인생에 딱 한 번 있는 대회라고 생각하고 도전 정신을 갖고 뛰었으면 좋겠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여유를 갖고 지금까지 준비해온 대로 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난 후 인사를 나누던 도중 송주희는 "아까 제가 못했던 말이 있는데요. 꼭 해야 하는데"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이야기 중 미처 못한 이야기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이 구단이, 후배들이 2010년에 U-17 여자월드컵 우승, U-20 여자월드컵 3위 대기록을 세웠을 때 그 붐을 타고 만들어졌거든요. 후배들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daeryeong@sportsseoul.com

사진ㅣ김대령기자·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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