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윤소윤 인턴기자]"박승희의 레이스에는 안정감이 있죠."


경기 때마다 캐스터와 해설진은 입을 모아 말했다. 빙판 위에서의 강경함, 단단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 낼 선수가 있을까.


0.1초의 싸움. 순간의 경쟁 속에서 수많은 이변이 발생하는 쇼트트랙은 각종 국제 경기 때마다 대한민국이 메달을 쓸어 담았던 효자 종목이다. 그러나 한국 코치진들이 해외로 대거 진출하면서부터는 매 경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승희가 스타트라인에 설 때 만큼은 안심해도 좋았다.


올림픽 3연속 출전, 금메달리스트, 올림픽 전 종목 최다 메달 보유자. 박승희는 자신이 일궈낸 이 모든 영예를 뒤로하고 오는 4월, 연고도, 아무것도 정해진 것도 없는 영국으로 떠난다.


"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요. 그냥 떠나는 거예요!" 평생을 얼음 위에서 살 것 같았던 그가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출국을 준비하는 박승희의 얼굴에는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 국가대표 스케이터→'워홀 준비생' 2막을 열다


박승희는 4월 출국을 앞두고 있다. 스케이트를 위해서가 아닌 '워킹 홀리데이'를 위해서다. "준비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제가 많이 어렸으면 몇 년씩 갔을 텐데(웃음) 가서 제가 얻는 게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정을 좀 늦게 했죠."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은퇴한터라 스스로도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왔다.


최근 박승희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자신이 그린 그림, 디자인 등의 게시물이 자주 업로드된다. "그림 그리는 거 정말 좋아해요. 저한테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림 그릴 때 너무 좋은 거예요. 행복하고" 스케이트를 탈 때의 단호하고 강단 있는 모습과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운동할 땐 진짜 안 아팠는데 그만 두니까 허해졌나봐요.(웃음) 자꾸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이 '좀 쉬었으면 좋겠다' 하셨는데…그러면서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뭘 할까 고민도 하고, 영국 가는 것도 결정됐죠."


국가대표 시절에는 운동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와중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던 방법은 다름 아닌 '패션'이었다. 은퇴 이후엔 디자인 공부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지만 그 외 시간엔 패션에 관련된 걸 많이 봤어요. 운동선순데(웃음). 이것저것 사기도 진짜 많이 사고. 근데 저…사실 운동복을 사 본 적은 없어요. 하하"


◇ '악으로 깡으로' 열아홉의 막내, 밴쿠버에 내민 '도전장'


박승희의 첫 올림픽은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다. 당시 그는 열아홉의 나이로 대표팀에 승선했으며, 패기 넘치는 막내로 팀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때는 정말 어려서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패기랑 깡만 있었죠(웃음)"


여자대표팀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부터 매대회 계주 금메달을 따왔으나, 박승희의 첫 올림픽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역대 최약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최대 라이벌인 중국 선수들의 상승세도 무서웠다. 그 때문이었을까. 당시 여자 대표팀은 처음으로 '노골드'의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박승희는 그런 와중에도 개인전 1,000m와 1,5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많은 국민들의 기억 속에 밴쿠버 올림픽이 뼈아픈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바로 여자 계주 경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팀은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실격 판정을 받아 중국에 금메달을 내줬다.


"그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1등으로 통과한 직후에는 눈물이 많이 났죠.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나 왜 이러지' 했는데 결과가 나오니까 눈물이 싹 사라졌어요." 깡과 패기의 박승희에게도 계주 실격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격 판정을 받으니까 억울했죠. 열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배웠어요. 혹독하구나.(웃음)"

◇ 소치 올림픽, 올라운드 스케이터로 '우뚝'


"소치 올림픽이 제 쇼트트랙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19세의 나이에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혹독함을 배운 박승희는 더욱 성장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 국가대표 개인전 멤버로 선발되며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박승희를 비롯해 조해리, 심석희, 김아랑, 공상정으로 구성된 대표팀은 올림픽 시즌 월드컵 내내 금메달을 쓸어모으며 최고의 성적을 내왔다. 그에 따른 국민의 기대감, 당연함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 법도 했다.


"부담은 안 됐어요. 저희 멤버 자체가 좋았고 사이도 좋았고. 기본적으로 연습량이 정말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불안함이 사라지더라고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컸고 준비도 철저했죠."


밴쿠버 당시 막내였던 박승희는 소치 올림픽에선 개인전 멤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당시 첫 올림픽이었던 김아랑과 심석희에게 그는 특유의 털털함으로 조언과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그냥 타라. 그냥 타. 그런 말을 해줬어요. 첫 올림픽의 긴장감을 저도 알기 때문에. 저도 실수했었으니까."


밴쿠버에서 빼앗긴 계주 금메달을 되찾기 위해 흘렸던 땀과 눈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훈련을)남자 선수들만큼 했어요. 저희가 경기 땐 총 3,000m를 도는데 연습할 땐 1만 미터를 탔어요. 그래서 몇 배의 체력이 생겼고 3,000m는 나중엔 껌인 거예요!(웃음)"


그러나 쇼트트랙은 언제나 이변이 따른다. 월드컵 내내 압도적인 실력으로 계주에서만큼은 안정적인 우승을 차지했던 대표팀이었지만 올림픽 당일에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경기 막판, 박승희는 중국의 판커신에게 추월을 당하며 모두를 아찔하게 만들기도 했다.


"맞아요. 저 때문이었어요 하하. 근데 사실 마지막에 석희랑 타는 선수가 잘 타는 선수가 아니어서 불안하지 않았고 그냥 '석희가 잘 할 거다' 생각했죠.(웃음)"


소치는 박승희에게 최고의 순간이자 최고의 아쉬움을 선사한 무대기도 했다. 500m 결승전 경기는 국민들에게도, 박승희에게도 여전히 가슴 아픈 기억이다. 당시 박승희의 몸 상태는 최고였다. 모든 것이 뒷받침됐기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다. "소치 때 저는 정말 완벽했어요. 500m에서 다치기 전까지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일 정도였으니까."


때문에 국민들의 기대 역시 컸다. 1994년 동계올림픽의 원혜경 이후 대한민국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500m 결승(Final A)에 진출했기 때문. 그런 국민들의 기대를 업고 박승희는 '올라운더 스케이터(단거리와 장거리 모든 종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선수)'다운 면모를 가감 없이 뽐냈다. 예선전과 준결승전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가장 유리한 1레인을 배정받기도 했다.


모든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손을 모았던 결승전. 대한민국이 숨을 죽였던 경기가 시작됐다. 4바퀴 반, 40초의 싸움. '탕!' 시작 총성 이후 그는 계속해서 선두를 달렸다. 남녀 통틀어 대한민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500m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기 직전. 그러나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다른 선수들의 충돌에 미끄러지며 눈앞에서 금메달을 놓쳤다. '아…!' 전 국민이 탄식했던 순간이었다.


"제 쇼트트랙 인생에서 소치 500m 경기, 그거 딱 하나만 아쉬워요 정말." 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를 회상하며 상기된 표정으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저 말고 다들 우셨어요. 저는 눈물이 안 났어요. 너무 짜증 나서(웃음). 제가 생각해도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제가 가끔 운동하면서 꾀를 부렸던 시기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전성기를 쏟아 부었던 소치 올림픽. 박승희는 1,000m 금메달, 500m 동메달, 계주 금메달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두 번째 올림픽을 마무리했다. 소치 올림픽 직후 열린 '2014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는 올림픽 당시의 아쉬움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500m 우승을 차지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여자 선수 최초의 세계선수권 500m 금메달이었기에 의미가 컸을 법도 했다. "세계선수권 500m 금메달의 의미가 남달랐겠다"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승희는 "올림픽 메달이랑 바꾸고 싶었어요!"라고 단호하게 답하며 크게 웃었다.


"그 당시 인터뷰에서도 말했어요. 메달 바꾸고 싶다고. 저 운동에 대한 미련 0.1%도 없거든요. 할 때 만큼은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래도 시간을 한 번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가고 싶을 만큼 정말 아쉬워요."


◇ 마지막 올림픽 '평창', 가족을 위해 달리다


소치 올림픽을 끝으로 모두가 박승희의 행보에 주목했다. 다시 태극마크를 달고 평창 올림픽에 도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박승희는 종목을 전향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운동에 지쳤던 그가 종목까지 전향하며 올림픽에 다시 도전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가족' 때문. 박승희의 언니인 박승주는 스피드스케이트 국가대표로, 남동생 박세영은 남자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게 컸어요. 저희 언니가 소치 끝나고 은퇴를 했는데 동생이 혼자 평창 올림픽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고민을 많이 했죠. 저는 운동하기 싫은데(웃음). 또 여태까지 두 종목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아 해볼까?' 그 마음 하나로 시작했어요. 평창 올림픽 유니폼도 예뻤고."


같은 빙상 종목이었지만 올림픽을 위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 박승희의 부담감과 어려움은 쇼트트랙 선수 시절보다 컸다. "사실 전향 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4년 내내. 경기 전날까지도 '괜히 했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락가락이었죠."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에서 4년이라는 짧은 준비 기간 역시 그에게는 또 다른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9살 때부터 쇼트트랙 선수로만 살아왔기에 그 고민은 더욱 커졌다. "스피드스케이팅이라는 새로운 종목으로 좋은 성적을 내기엔 4년이라는 시간이 짧았어요. 그래서 경기 끝나고도 안 울었는데…"


말끝을 흐리던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경기 끝내고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분들 뒤로 멀리 저희 엄마가 보이는 거예요. 미안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처음으로 저희 가족이 제 경기를 보러 다 오셨어요. 이모에 삼촌까지. 근데 제가 메달을 못 걸었으니까…"


쇼트트랙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언제 어떤 경기든, 어떤 색깔이든 항상 메달을 걸어왔던 그였기에, 메달에 대한 당연함이, 그에 따르는 부담감이 컸던 터였다.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 같아서 눈물이 났고 짜증이 났어요 하하. '이걸 왜 했지' 후회도 많이 되고 후련하기도 하고."


경기 때는 수많은 생각과 걱정에 매일 같이 고민했었지만, 은퇴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쿨하게 결정 내렸다. "제가 사실 올림픽 직전 월드컵에서 몸이 정말 좋았어요. 기록을 2초나 당겼는데 연습하면서 다치는 바람에 회복을 못 했죠."


완벽하지 못한 몸 상태로 출전한 올림픽에서도 개인 최고기록을 세웠기에 모두가 그의 은퇴를 말리기도 했다. "코치 선생님도 저한테 4년만 더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뭔가 될 것 같았나 봐요. 근데 저는 '그냥 죄송하다! 너무 힘들다!'하고 그냥 후련하게 그만뒀죠."


◇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 '팬'


인터뷰 내내 시원하고 화끈한 대답으로 줄곧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박승희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던 순간은 바로 자신의 '팬'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평창 올림픽과 은퇴 선언 이후 박승희는 처음으로 팬 미팅을 진행하며 선수 시절 내내 자신을 응원해준 사람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올림픽 이후 팬이 많아지지 않았나요?" 묻자 "저한텐 왜 안 보이시죠?(웃음)"라며 되묻기도 했다.


팬 미팅을 열게 된 계기는 온전히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팬 미팅은 은퇴 결심했을 때 하고 싶었어요. 사실 메달을 따는 건 저한테 좋은 거고, 명예도 메달도 전부 다 제껀데 팬분들에게 돌아가는 건 사실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진심으로 응원해 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그 마음이 너무 대단하기도 하고."


팬들 얘기를 하는 내내 연신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사실 되게 부끄러워요. 저는 저에 대해서 제가 좋은 사람인가 생각을 참 많이 하거든요. 저도 사람이라 힘들 때도 많고 고민도 많고. 그럴 때 팬분들이 주는 편지, 메시지를 받으면 되게 많이 힘이 돼요. 더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시는 것 같아요."


평창 올림픽 당시 박승희는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 팬서비스도 꾸준히 해줬다. SNS에 박승희와 함께 사진을 찍은 팬들의 인증샷이 넘쳐날 정도. 박승희에게 팬서비스는 의무도 예의도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저요? (팬서비스)되게 못한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사실 사진 찍어주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제가 안 된다고 할 이유를 모르겠어서요. 하하."


은퇴한 이후 팬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사실 좀 속상해요. 은퇴했기 때문에 팬분들이랑 만날 기회가 적어지니까"라며 아쉬운 속내를 드러냈다. "그래서 제가 영국 다녀와서 같이 밥이라도 먹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몇 분이나 오실진 모르겠지만?(웃음)"


그에게 팬이란 응원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서로를 위하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오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팬분들과 자주 볼 순 없겠지만, 오랫동안 알아가고 알아주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좋은 기운이나 영향을 나누면서 그렇게요."


◇ '여전히 꿈을 꾸는 박승희'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태극 마크를 달았던 국가대표 선수들은 대부분 올림픽 후에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인생의 최종 목표였던 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에 오는 허탈감 때문이다. 그러나 박승희는 달랐다.


"초반엔 무조건 옷 디자인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근데 은퇴하고 이것저것 배우니까 생각이 몇백 번 씩 바뀌는 거예요. 제가 관심있는 게 다 예술 쪽이거든요. 포토그래퍼도 하고 싶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기도 하고"


영국으로 떠나는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함이다. "막상 무언가를 하려고 하다 보니까 모르는 게 여전히 많더라구요. 그림으로는 어떤 직업이 있는지, 사진으로는 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고민이예요. 뭘 해야 하는데 제가 진짜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국도 가는 거고"


쇼트트랙 선수를 하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지시에 따르고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박승희는 그때와는 달랐다. "제 미래를 찾으러 간다기보다는 제가 혼자 뭔가를 스스로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가는 것 같아요. 이 세상이 좀 어렵잖아요?(웃음)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혀 보려고요."


최종 꿈을 묻는 물음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봐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시도 할 용기를 가지러 떠나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는 겁을 내는 편이라 그런 걸 깨고 싶고, 모르는 사람이랑 지내보기도 하고. 그런 거 생각보다 잘 못 해요 제가, 하하. 갔다 오면 뭔가 하게 되겠죠?"


리와인드, 그의 인생을 되돌아보기엔 앞으로 박승희에겐 '플레이'될 인생이 훨씬 더 많다. 이제 더 이상 스타트 총성을 기다리며 긴장할 일도, 누군가를 추월해야 할 일도, 0.01초의 경쟁 속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다.


온전히 박승희 혼자 서 있는 스타트 라인에서, 언제 출발을 해야 할지, 몇 바퀴가 남았는지, 어떤 것이 좋은 성적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승점 역시 없기에, 앞으로 펼쳐질 그의 찬란한 2막을 기대해 본다.


younwy@sportsseoul.com


사진 | 스포츠서울 DB, 윤소윤기자 younw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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