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인천 l 글·사진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 때는 2004년, 유례없는 현대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9차전. 현대가 8-7로 앞선 9회 2사 1, 2루 상황. 경기 시작 전부터 내린 장대비는 그칠 줄 몰랐고, 마운드엔 '조라이더' 조용준이 서 있었다. 빗방울을 뚫고 홈플레이트로 향한 조용준의 슬라이더는 경기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됐고, 현대의 우승으로 귀결됐다.


2002년 현대에 입단한 조용준의 선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입단 첫해, 28세이브를 올리며 생애 한 번뿐인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현대 역시 2003, 2004시즌 2년 연속 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부상과 재활, 방출 그리고 간암 판정까지 받으며, 한때 야구를 등지기도 했다. 야구가 아닌 다른 일도 해봤지만, 그의 선택은 다시 야구였다. 인천에서 만난 조용준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 '어깨 수술 판정' 딛고 수상한 신인왕


순천 효천고-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조용준은 2002년 프로 무대를 밟는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완전치 않았다. "입단하기 전에 이미 어깨 수술 판정을 받았다. 구단도 알고 있었다. 당시 김용일 트레이닝 코치였는데, 누구보다 제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래서 김 코치가 코칭스태프에게 '어깨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선발보다는 불펜이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거로 알고 있다. 그래서 불펜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데뷔 첫해 조용준은 승승장구했다. 그해 성적은 109이닝 동안 9승 5패 28세이브, 평균자책점 1.90. 신인상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사실 많이 안 던진 건 아니다. 그래도 구단에서 휴식도 주고, 관리도 잘해줬다"고 전하면서 "팀이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필요하다는데 어떤 선수가 안 던지겠나.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피곤해도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다. 구단에서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줬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빗속 혈투' 2004년 한국시리즈,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


그의 활약에 현대는 팬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조라이더'라는 별칭을 붙인다. 조용준의 슬라이더가 남다른 점은 무엇일까. "저는 슬라이더를 한 가지 방법으로 던지는 게 아니고, 상황에 따라 변형했다. 속도는 빠르고 각이 작은 공이 있는 반면, 또 필요할 땐 속도는 떨어지지만 각도는 큰 슬라이더를 던졌다. 그런 패턴의 변화가 잘 먹힌 것 같다"라면서 "왼손 타자들한테 슬라이더가 잘 안 통할 때는 결정구로 서클 체인지업을 썼다"라고 비결을 털어놓았다.


혜성처럼 등장해 별명까지 얻은 조용준은 2004년 맹위를 떨친다. 63경기에 출전해 75이닝 동안 10승 3패 34세이브, 방어율 2.28을 기록한다. 눈에 띄는 건 피홈런이 없다는 점이다. 조용준은 "홈런을 맞지 않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은 없다. 실투가 생각보다 안 나왔던 것"이라면서 "홈런을 안 맞으려고 던진 건 아니다. 운이 좋았던 것뿐"이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그의 활약은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7경기에 출전해 12.1이닝 2실점(비자책) 3세이브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하며 현대의 뒷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한국시리즈 MVP도 조용준에게 돌아갔다. 특히, 장대비 속 펼쳐진 9차전 혈투는 아직도 회자될 정도다. 조용준은 "생각보다 제가 집중력이 좋다. 그때도 '이겨야 해' '이기면 우승이야'라는 생각보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순간 마운드에서 나한테 놓인 숙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몰두하고 집중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어깨·허리 부상→방출…"야구가 싫었다"


영광도 잠시, 어깨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부상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자세를 고쳐 잡은 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핑계로 들릴 수도 있는데"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제가 했던 수술이 지금 류현진 선수와 같은 '슬랩(SLAP)'이라는 건데, 어깨 수술을 하고 나면 보통 재활을 거쳐 실전 경기까지 1년 정도 잡는다. 하지만 저는 2005년 9월에 수술하고, 이듬해 3월 2군 경기를 뛰었다. 정상적인 투구 없이 수술 후 6~7개월 만에 실전에 나선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어디에도 없는 재활"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몸 상태가 빠르게 올라갔다. 첫 등판 때 직구 구속이 141km가 나왔다. 6월 초에 '1군 합류가능' 기사가 났었다. 그렇게 세 번째 등판 날, 팔이 잘 안 풀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통증이 다시 왔다. 이후에 통증이 반복됐고, 복귀도 무산됐다. 당시 '재활 태도 불량'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코치들이 만류할 정도로 진짜 열심히 재활했다"고 강조했다.


부상은 연봉 협상에서도 걸림돌이 됐다. 2007년 연봉 감액 정도를 놓고 구단과 이견이 있었던 조용준은 미계약자로 분류돼 전지훈련에도 불참한다. 당시에 '잠적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는 "구단에서 미계약자는 훈련에 참가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선배들과 구단 매니저에게 미국에서 훈련 한다고 말하고 넘어갔다. 미국에서 3개월간 재활이 잘 됐고, 통증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렇게 조용준은 2008년 10월, 연봉 8000만 원에 계약하고 팀에 합류한다. 하지만 이번엔 허리가 말썽이었다. 그는 "동계 훈련 때, 허리디스크가 왔다.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병원에서 수술을 권유했지만 저한텐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우여곡절 끝에 조용준은 2009년 8월 16일, 1432일 만에 1군 마운드를 밟는다. 또 9월 10일에는 무려 1455일 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그때 몸 상태는 80% 정도였다. 구속도 잘 나왔고, 연투도 됐다. 나머지 몸 상태는 경기를 하면서 올리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허리디스크가 발목을 잡았다"고 아쉬워했다.


조용준은 끝내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고, 2010년 전지훈련지에서 허리 통증으로 조기귀국 한다. 구단 역시 조용준에게 방출을 통보한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지친 상태였다. 야구를 더 하고 싶었으면, 다른 기회를 알아봤을 거다. 하지만 방출되고 전화번호를 바꿨다. '야구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상했다.


◇ 간암 판정…죽음 앞에서 '삶'을 떠올리다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11년 간암 판정을 받는다. 그는 "방출되고 나서 저 스스로한테 '네가 하기 싫어서 그만두는 거 아니야'라고 위안했다. 야구 말고 다른 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까지 1주일의 시간이 있었는데,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담담히 전했다.


죽음 앞에서 그를 일으킨 건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다. "수술 당일 새벽에 아내가 임신 소식을 전했다. 전화를 끊고 '죽어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앞에서 살기로 마음먹었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현재는 완치 판정을 받은 상태. 그는 "햇수로 8년째인데, 그동안은 결과가 괜찮았다. 며칠 전에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건강을 되찾은 조용준은 2012년에는 '여수 EXPO'의 진행요원 일을 하며, 야구 말고 다른 살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야구를 떠올렸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대중들 앞에 선다. "조용준이 살아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야 사람들이 나를 찾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해설위원을 하게 됐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 돌고 돌아 '다시 야구'...가르치는 재미에 빠지다


그렇게 4년간의 해설 위원 생활을 마친 조용준은 신일고등학교 인스트럭터와 덕수고등학교 코치를 거쳐 올해 1월부터 인천 모처에 '조라이더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만들어 초-중-고등학교 엘리트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이제 만 1년이 됐는데, 처음엔 힘들었다. 자리 잡은 게 2~3달밖에 안 된다. 지금은 그래도 평판도 나름 괜찮고, 부모님들도 만족하고 있다"고 뿌듯해 했다. 이어 "내가 지도하는 부분을 아이들이 자기 걸로 만들려고 한다. 저도 진지하게 대하고 있고, 아이들도 잘 받아들이고 있다. 나름대로 재밌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그만의 지도 철학도 분명했다. 그는 "사실 웃어도 인상을 써도 힘들다. '이왕이면 웃으면서 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현장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왜 이런 동작을 해야 하는지', '몸을 왜 이렇게 써야 하는지'를 아이들이 이해할 때까지 알려준다. 할 때는 진지하게 해도 훈련이 끝나면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대하려 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야구가 아니었으면 조용준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을 거다. 지금도 야구 덕분에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평생 야구랑 함께 하지 않을까 싶다"며 야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야구는 때로 조용준에게 실패와 좌절을 안겼지만, 그럼에도 그의 옆엔 야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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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 스포츠서울 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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