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원 서울가요대상...크라잉넛, 화려한 오픈무대!

[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어린 시절부터 단짝이던 친구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에서 기타를 잘치는 학우의 공연에 여성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이거다. 밴드를 하자.’ 그렇게 그들은 마이크를 손에 쥐게 됐고, 기타, 베이스, 드럼 스틱을 잡았다. 대한민국 펑크록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동부이촌동에서 어린 시절 ‘록스타’를 꿈꾸던 이들은 1995년부터 4인조 펑크록 밴드를 결성했는데, 이 팀이 바로 ‘크라잉넛’(보컬 겸 기타 박윤식, 기타 이상면, 베이스 한경록, 드럼 이상혁)이다. 결성 직후 이 팀은 홍대 인디씬을 평정하다시피 했다. 크라잉넛 앞엔 늘 ‘최초’,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95년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1996년 펑크록 앨범을 낸 최초의 국내 인디밴드였고, 한국어로 된 펑크록 노래(말달리자)를 처음 발표한 팀이기도 했다. 홍대 인디씬을 일으킨 1세대 스타였고, ‘펑크록 팀들은 괴팍하고 거칠다’는 편견을 깨고 90년대말부터 TV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은 성실하기까지 하다. 몇년후 팀에 정식 합류한 키보드 김인수까지 5인조를 구축한 뒤 단 한번도 멤버 탈퇴나 교체를 경험하지 않았다. 이들의 소속사(드럭레코드) 안준석 대표까지 멤버들의 유치원 동창으로,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 하는 중이다.

크라잉넛은 지난 15일 열린 ‘하이원 서울가요대상’에서 밴드 부문상을 받은 뒤 국내 힙합 1세대 ‘끝판왕’ 드렁큰 타이거와 감동적인 합동 무대를 만들어내며 음악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음은 앨범별로 돌아본 크라잉넛의 역사.

◇아워네이션 1집<주=1996년 발매. 옐로우키친과 함께 한 합동 앨범.국내 인디 앨범의 효시로 평가받음.>-옐로우키친이란 팀과 함께 ‘아워네이션’ 1집(1996)을 만든 게 국내 인디 앨범의 효시로 평가받는다.(박윤식)

홍대 앞 클럽 ‘드럭‘에서 공연하다가 ‘이러다 망하겠다. 얼른 앨범 내자’ 싶어 낸 앨범이다. 당시 드럭 사장이 만들어준 앨범이다.

(이상혁)

지하실 클럽 사장이 우리 매니져가 됐다. 당시 드럭에서 많은 팬을 끌어모으는 두 팀이 함께 앨범을 내보자는 기획이었다. 녹음은 간단하게 진행됐다. 6~7곡을 하루이틀만에 녹음했다.

(한경록)

그 앨범에 ‘말달리자’ 초창기 버전도 수록돼 있다. 우린 95년부터 클럽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부터 자작곡를 만들어 나갔다. ‘말달리자’는 우리가 3번째쯤 만든 초창기 노래다. 그 앨범 수록 버전은 한국어로 만든 최초의 펑크록 곡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록음악은 뭔가 영어로 해야 할 거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홍대에 차츰 우리 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흐름을 타고, 홍대 주차장 골목 길을 막고 무대를 세워서 ‘스트리트 펑크쇼’라는 공연도 펼쳤다. 뒤죽박죽 뭔가를 밀어붙였다.

(박윤식)

‘아워네이션’은 국내 최초의 인디 앨범이다. 그때 한국의 인디 펑크 팀들은 ‘기존 씬에선 썩은 음악을 한다’고 여겼다. 반항적인 시기였다.

(이상혁)

아워네이션은 우리가 뭔가 뭔가 꿈을 꾸기 시작한 시기에 만든 앨범이고, 꿈을 꾸게 만들어준 앨범이기도 하다. 유통 방법도 몰라서 공연장이나 홍대 앞 레코드 가게에 직접 가져가기도 했다.

(한경록)

당시 시스템을 몰라서 유통 사기도 맞았다. 씨디를 갖다주고 돈을 못받기도 했다.

[포토] 크라잉넛, 밴드 부문상을 거머쥐고~!
밴드 크라잉넛이 15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진행된 ‘제28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시상식에서 밴드 부문상을 수상하고있다. 사진 |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아워네이션’ 앨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나.(박윤식)

사람들은 우리 음악을 싫어했다. ‘아워네이션’을 들어보면 음질도 엉망이다. 사람들은 ‘이 놈들 뭐야, 연주도 형편없다’고 했다.

(한경록)

‘아마추어리즘’을 싫어하던 시기였다. 기존 메탈, 록음악계엔 엄숙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그런데 우린 놀이 문화를 끌어들였다. 즐겼다. 음악을 못한다고? 하다보면 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음악계에서 ‘너네 음악은 장난이다’라는 시각으로 우리를 봤다. 그런데 장난해도 되잖나?

(김인수)

음악의 다양성이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획일화를 강요 받았던 것 같다.

(이상혁)

펑크 음악이 처음 도입될 무렵 외국에서 얼터너티브 록 붐이 일었다. 외국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들이 한번씩 우리 공연을 왔다. 술이라도 한잔 하면 ‘너네가 펑크를 아냐?’, ‘너네 잘사는 동네(동부이촌동) 출신 애들이잖아. 펑크를 아냐?’고 지적을 많이 했다.

(한경록)

우리에게 시비를 진짜 많이 걸었다. 펑크 음악은 영국 노동자가 어쩌고 저쩌고.

-초창기 홍대 클럽씬을 주무대로 꾸준히 활동했다.(이상혁)

동료 밴드 중에 많은 돈을 받고 기획사로 간 팀들도 있었다.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뚜렷한 팀도 많았다. 우리에게 어떤 청사진이 있었다면 그렇게 클럽에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공연하는 지하실(드럭)이 제일 재밌다고 생각했다. 장사도 잘 안됐지만 어쨌든 버텼다.

(박윤식)

그 무렵 차승우(전 노브레인, 문샤이너, 모노톤즈 기타리스트)와 술마시다가 ‘홍대에 다니는 많은 젊은이가 기타를 매고 다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얘기했었다. 펑크록이 흥하는 시대를 꿈꾼 것이다. 신기하게 요즘 보면 기타를 많이 매더라. 그런데 포크 등 다른 음악 장르가 각광받고 있다.(웃음)

◇1집 ‘말달리자’<주=1998년 발매. 타이틀곡 ‘말달리자’ 국민적 히트. 약 12~13만장 판매 추정>-‘말달리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TV에서 펑크록 밴드인 크라잉넛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게 신기했다.(박윤식)

방송국에 처음 가본 시기였다. TV를 통해 우리를 본 사람들은 ‘저 이상한 애들은 뭐야. 한국인이야 외국인이야’ 알쏭달쏭해 했다.

(이상면)

1집 ‘말달리자’부터 3집 수록곡 ‘밤이 깊었네’ 활동까지 방송을 참 열심히 했다. 신기한게 난 같은 시기 활동했던 H.O.T.나 god,이효리의 음악을 모른다. 기억에 없다. 살벌하게 행사와 공연에 집중했다는 방증이다.

(한경록)

1집 때 방송에 출연하고 하니 ‘말달리자‘가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었다. 이전에도 ‘말달리자’는 나름 인디씬이나 PC통신에서 알려진 매니악한 노래였지만 방송의 파급력은 확실히 달랐다. 우리 팀이 물위로 떠오른 시기였다.

(이상혁)

당시는 방송에 나가냐 안나가냐로 판가름이 났다.

(이상면)

나 혼자 기타를 돌리는 장면으로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팀도 광고를 몇편 찍었던 시기다. 그렇게 부를 축적한 후 술로 탕진했다.

-인디밴드로는 예외적으로 방송에 열심히 나왔다. 인디씬에서 비판 여론도 있었을 것 같다.(김인수)

내 편이 없을 때가 가장 편하다. 그럼 그냥 모두가 적이다.

(이상면)

방송의 힘을 무시할 수 없더라. 지하실에만 머물러 있으니, 우리를 대중이 알 수 없었다.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말달리자’가 빵 터졌다. 나중에 행사를 하는데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에게 명함을 받기도 했다.

(한경록)

우리 활동 방식을 놓고 ‘인디냐 인디가 아니냐’, ‘펑크냐 펑크가 아니냐’ 논란이 존재했다. 하지만 아워네이션 앨범, 스트리트 펑크쇼 공연등을 해보니 마케팅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방송까지 나갔으니... 당시 자주 받던 질문이 ‘너네는 메이져냐, 아니냐’였다. 1~2년후엔 우릴 욕했던 밴드들이 다 따라하더라.(웃음)

(이상면)

방송에선 우리를 자꾸 말 안듣는 이미지로 몰고 갔다.

(한경록)

실제로 방송에서 사고친 적은 없다.

(이상혁)

한번 드럼을 치다가 스틱을 던졌는데 그게 하필 카메라를 맞췄다. 그래서 카메라 감독님께 엄청 혼났던 기억은 있다.

-여러 논란, 비판 여론을 어떻게 이겨냈나.(이상혁)

우리는 스스로 자화자찬만 했다. 우리는 멋있다고 늘 생각했다.

(한경록)

우리는 알고 보니 멋있었다.

(김인수)

사람이 크게 되려면 댓글을 읽으면 안된다. 그땐 그런 게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

한경록)

공연도 재밌었지만 풍류 생활도 즐겼다. 재밌게 놀았다.

-초창기 활동 방향 등을 놓고 멤버간 마찰은 없었나.(한경록)

뭘 할 때마다 회의를 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민주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꼭 옳은 방향이 아니라도 모두의 의견이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최대한 공정한 방향으로 결정하려 했다.

(박윤식)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땐 있었다. 1집 활동 때 누나 매니저가 있었다. 원래 검은 머리였는데 6개월만에 흰머리가 돼 나갔다. 정말 영화 ‘백발마녀전’ 주인공처럼 돼버렸다.(웃음) 핸드폰도 없던 삐삐 시절이라 멤버들이 모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다.

-사실상 데뷔곡인 ‘말달리자’가 가장 큰 히트곡이다. (한경록)

그 당시 록음악도 핌프록 등 유행하는 스타일이 존재했다. 우리는 그런 트랜드를 안 쫓았다. 어느 정도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많이 촌스럽진 않았던 것 같다.

-최고의 히트곡 ‘말달리자’를 지금까지 몇번이나 불렀나.(한경록)

24년째 365일 활동 중이다. 우리가 몇번이나 공연했는지 궁금해서 계산해 본 적이 있다. 일년에 140~150회 정도 하는 것 같다. 성수기인 5월엔 20번 공연을 하기도 한다. 1년에 150번 정도 공연을 하니 ‘말달리자’를 약 3000번 정도 불러본 것 같다.

(이상혁)

행사에서 ‘말달리자’를 1절만 하고 끝낸 적도 있다. 부르다가 ‘지금이 1절인지 2절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2절에서 마쳐야 하는데 3절까지 간 적도 있다. 그러면 연주하다가 ‘오늘은 노래가 좀 길다’는 느낌을 받는다.

(박윤식)

가끔 헷갈린다. 내가 부르는 게 1절인지 2절인지 아리송하다.

(한경록)

그래도 지겹지 않다. 연주할 때마다 속도가 다르다. 똑같으면 얼마나 지겹겠나. 가끔 편곡, 엔딩을 바꿀 때도 있다.

(이상혁)

노래가 짧아서 괜찮다. 5~6분이면 지겨웠을 지 모른다. 히트곡은 짧아야 한다.

monami153@sportsseoul.com

<크라잉넛이 15일 고척돔에서 열린 제28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에서 오프닝 무대를 펼치고 있다. 사진 | 배우근기자 kenny@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