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진해|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에서 샘이 있다는 희망을 품듯, 반복되는 삶 속에서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안고 살아가라는 것이 어린 왕자가 말하고 싶은 바가 아니었을까.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실제 주인공 감사용(61)에게는 '야구'가 사막의 샘같은 존재였다. 야구밖에 모르던 감사용은 직장인 야구를 하다 프로야구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이하 삼미) 창단 멤버로 합류해 5시즌 동안 1승 15패라는 기록과 '영원한 1승 투수' '패전전문투수'라는 수식어를 남긴 채 선수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내려온 고향에서 그는 한 마트의 관리부장으로, 또 고깃집도 운영을 하는 등 외도(?)를 했지만, 현실의 쓴맛만 본 채 그만뒀다. 결국, 그의 선택은 다시 야구였다. 그렇게 지난 2007년부터 경남 창원시 진해리틀야구단을 운영 중이다. 찬바람이 불던 창원의 어느 풋살장에서 만난 그는 누군가에게 또 희망이 될지 모르는 야구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영화 같았던 야구와의 '첫 만남'


야구밖에 모르는 감사용과 야구의 첫 만남은 영화 같았다. 그는 "어릴 적 돌멩이 던지는 걸 좋아했다. 멀리 날아갈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러다 진해 공설운동장을 갔는데, 처음으로 야구 구경을 하게 됐다. 그때 야구공이 내 앞으로 굴러 와서 던져줬는데, 코치가 '소질이 있다'고 말을 했다. 집으로 가서 아버지한테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렇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영화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야구와 인연을 맺은 감사용은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에 매진했다. 그는 "이왕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한 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전하면서 "단체운동 전후에 늘 개인 운동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렇게 했다. 열심히 했지만 전국 시합 때는 두각을 못 나타냈다. 결국 좋은 대학은 못 가고, 인천체육전문대학에 입학했다"고 자신을 되돌아봤다.


대학 입학 후에도 구슬땀을 흘리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대학교 2학년 때 무리한 운동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 때아닌 부상으로 감사용은 야구를 쉴 수밖에 없었고, 군 문제를 해결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하지만 제대 후 감사용은 삼미특수강이라는 회사에 입사해 구매 관리와 통관 업무를 맡게 된다.


◇직장인 야구→삼미의 창단 멤버로


그땐 몰랐다. 삼미특수강 입사가 다시 그를 야구로 이끌지. 당시는 직장인 야구가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고, 감사용은 삼미특수강을 창원 공단 최고의 팀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감사용이 삼미특수강에서 야구 '붐'을 일으킬 무렵. 때마침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삼미가 진해로 동계훈련을 내려왔고, 감사용은 삼미의 코칭스태프에게 눈도장을 받게 된다.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감사용이 공개 트라이아웃을 통해 삼미에 입단한 거로 나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감사용은 "삼미가 전지훈련을 위해 진해로 내려왔고, 나는 파견 근무 형태로 삼미가 훈련하는 내내 매일 배팅 공을 400개 정도씩 던졌다. 그러다 합숙이 끝나는 시점에 마지막 테스트를 겸한 OB(現 두산 베어스)와의 친선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3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경기가 끝나고 박현식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이 '네가 우리 팀에 필요하니 같이 인천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그래서 곧장 이불이랑 옷만 들고 인천으로 올라갔다"고 삼미 입단의 진실(?)을 밝혔다.


삼미에 합류하며 야구선수의 삶을 시작했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6번째 구단으로 리그에 턱걸이한 삼미의 전력은 다른 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첫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5:3 승리를 거두며 기대감을 높였지만, 전·후기리그 통틀어 80경기에서 15승에 그칠 정도로 약팀이었다. 그는 "패배에 대한 실망감은 있었다. 끝나고 나면 선수들끼리 '1승 하자'라고 서로를 다독였지만 마음대로 되

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혼신의 힘' 다한 선수생활


1982년 감사용의 기록은 41경기에 출전 133.2이닝, 1승 14패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패전전문투수'라고 부르지만, 감사용의 생각은 달랐다. "구원 투수로도 많이 나갔지만, 선발 출전도 20경기 정도는 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투수층이 약하다 보니 솔선수범해서 나간 경우도 많다. 누군가는 마운드에 올라가서 마무리해야 됐기 때문이다. 133.2이닝을 던진 건 내 맡은 바 임무를 다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영원한 1승 투수'라는 수식어에 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마운드에 올라가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내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1982년도에는 기록이 중요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5승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하면서 "1승이라는 건 열심히 한 나에게 주는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1승도 못하는 투수들도 많은데, 1승을 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복 받은 사람"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삼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감사용은 1986년 OB로 적을 옮겼고, 해당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정리한다. 그는 "삼미에 있었던 신용균 코치가 OB로 갔고, 그래서 신 코치에게 '김성근 감독님 야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OB 단장과 면담을 했고, 합류하게 됐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다.


이어 "당시 OB의 선수 구성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배팅 공을 던지겠다고 자청했다. 전반기 끝날 때 합류해 광주에서 치른 해태와의 경기(3이닝 1실점)가 OB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다"라고 추억했다. 그러면서 "사실 그때 OB에서 고맙게도 전력 분석원 제안을 했지만, 나는 고향에서 야구 저변을 위해 힘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고, 그렇게 창원으로 내려왔다"고 전했다.


◇감사용을 일으켜 세운 고향의 '야구 저변 확대'


그러나 불모지에서 야구 저변을 확대하는 일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2006년엔 국제디지털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지만, 그마저도 1년 6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만다. 감사용은 당시를 떠올리며 "경험이 없다 보니까 잘 안 됐다.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울하기는 했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야구는 그에게 실패감을 안겼지만, 그의 선택은 어김없이 야구였다. 마트의 관리부장 일도, 고깃집 운영도 했지만 감사용과 야구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그동안 야구 말고 다른 일도 하면서 때론 돈도 벌었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라고 변함없는 야구 사랑을 드러냈다. 결국, 그는 2007년부터 창원시 진해리틀야구단 감독을 맡으며, 고향의 야구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리틀야구단이라고는 하지만,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터. 회비가 있음에도 야구공을 비롯한 훈련과 경기에 필요한 장비와 물품들은 감사용의 사비로 마련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땅한 야구장도 없어, 체육공원의 구석에 자리한 자그마한 풋살 구장을 빌려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리틀야구단 운영의 현실적 어려움, 그럼에도 다시 '야구'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야구를 향한 아이들의 열정은 추운 날씨를 잊게 할 만큼 컸지만, 그들의 꿈을 더 크게 키워줄 지원도 환경도 부족했다. 진해리틀야구단 소속의 자식을 둔 한 아버지는 "진해에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야구장도 없고,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더 많은 아이들이 야구를 배우지 못하는 점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호소했다. 감사용 역시 "진해리틀야구단 출신 학생이 프로에 가는 게 목표지만, 현실적으로 저변이나 여건상 쉽지 않다. 열악하다"고 털어놓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과 직면하면서도 11년째 진해리틀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사용은 "야구는 변함이 없고, 거짓이 없다. 노력한 만큼, 땀 흘린 만큼 성과가 나타난다. 내가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몸소 겪은 것이다. 성실하게 하면 된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진심을 전하면서 "나날이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다"고 제자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이따금 연습에 매진하는 아이들에게 가 있었다. '야구는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 인생"이라고 짧게 답했다. 감사용이 곧 야구였고, 야구가 곧 감사용이었다.


beom2@sportsseoul.com


사진 l 스포츠서울 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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