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모
공주시청 박경모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공주 |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공주|글·사진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올림픽은 전 세계 스포츠인의 축제다. 선수들의 경기력에 주목하고 그들이 올림픽 무대에 오를 때까지 흘린 땀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대회가 막바지로 흐를 때 주목해야 할 건 선수들의 경기력도, 메달 색도 아닌 청춘남녀의 열애 스토리다. 한 대회가 끝날 때마다 스포츠커플이 탄생했다. 박경모(43) 공주시청 감독은 지난 2008년 8월 한국 양궁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는 당시 후배 박성현(35·전북도청 감독)과 깜짝 결혼 소식을 전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을 태릉선수촌에서 준비하며 남몰래 사랑을 키웠다. 열애설도 없이 결혼 소식이 전해지며 두 사람의 주변뿐 아니라 한국 양궁계까지 놀랐다.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이어 2008 베이징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두 사람의 만남은 뜨거운 응원을 받았다. 이 신궁 커플은 바늘구멍 뚫기 보다 어렵다는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두 대회 연속 메달권에도 성공했다. 특히 박경모(금2·은1) 박성현(금3·은1) 부부는 올림픽에서 7개의 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양궁이 지난 34년간 획득한 39개 메달의 20%를 따냈다. 양궁을 ‘올림픽 효자 종목’이라고 하는데 박경모 박성현 부부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박경모-박성현 결혼관련
박경모(왼쪽) 감독과 박성현 감독의 결혼 당시 모습. 제공 | 아이웨딩네트워크
◇‘신의 한 수’ 된 아내 박성현과의 결혼 보도박경모 감독은 아내 박성현과 지난 2008년 12월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베이징 대회를 준비하면서 1년여간 비밀 연애를 이어오다 베이징 대회 때 결혼 보도로 열애 사실이 공개됐다. 금메달리스트인 두 사람의 열애를 주변 사람 모두가 몰랐다는 사실에 지도자와 대한양궁협회 관계자들 모두 놀랐다.“당시 개인전이 끝난 후 결혼 소식이 보도되면서 정신이 없었다. 모두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인터뷰 중 귀띔한 게 기사화된 것이다. 당시 대회 끝나고 지도자와 협회 등에 알려서 차츰 소식을 전하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알려지니 수습하기 바빴다. 주위에서는 ‘이게 뭐냐’며 놀랐다. 당시 개인전 결승에 올라 금메달을 놓친 뒤였지만 후유증보다 이를 수습하느라 시쳇말로 ‘멘붕’이었다.”예정되지 않은 결혼 소식에 당사자들도 주위 사람들 못지않게 당황했다. 그저 연인끼리 결혼을 상의했을 뿐 양가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이 일로 박성현 감독에게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경모 감독은 당시 결혼 소식이 갑작스럽게 전해진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말했다.“(기사화된 게) 어쨌든 감사하다. 만약 기사화되지 않았다면 결혼이 늦어질 수도 있었다. 당시 ‘결혼을 언제 하느냐’는 질문에 ‘12월 첫째 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게 전부 기사화됐다. 부모님들께도 말씀도 안 드리고 우리끼리 생각만 했던 건데 덕분에 기사화된 날짜에 결혼식을 맞췄다. 원래 장인, 장모는 결혼을 안 시키려 했다더라. (박성현이) 대학을 졸업한 뒤 늦게 결혼시킬 생각이셨다. 어떻게 보면 신의 한 수가 된 셈이다. 아내가 한창 성장하는 시기였고 당시 여자들은 결혼하면 운동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주위에서 도둑놈 소리도 많이 들었다.”
박경모
공주시청 박경모 감독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공주 |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박경모 박성현 부부, 결혼도 ‘신의 한 수’신의 한 수는 박경모 박성현 부부의 인생에도 이어졌다. 지난 2001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인연을 맺은 뒤 친한 선후배 사이로 지낸 두 사람은 대표팀에서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운동하며 정을 쌓았다. 먼저 사랑이 싹튼 건 박경모 감독이었다. 그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고백했고 태릉에서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 “한 번도 들킬 뻔한 적이 없다. 데이트를 하더라도 첩보 영화처럼 했다. 데이트 후 내가 자가용을 타고 복귀하면 아내는 훈련장 한두 정거장 전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운동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연애할 때는 주로 맛있는 것을 먹으려 다녔다. 얘기도 양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부부가 같은 일을 한다는 건 얘기할 거리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또 서로의 고충을 잘 이해해주고 고민을 해결해준다. 박경모 박성현 부부도 양궁에 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지도자가 된 후에도 같은 고민을 나누며 서로의 인생을 발전시키고 있다. “많이 상의하고 물어보고 얘기했다. 서로 기술 교류를 많이 했다. 같이 감독을 맡고 있으니까 문제 있는 선수에 관해서 많이 상의한다. 같은 종목이고 문제점도 비슷하다 보니 서로 조언해줄 수 있다.”◇금메달 부부의 피를 물려 받은 세 딸결혼 후 박 감독이 공주시청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신접살림을 공주에 차렸다. 부부에게는 귀여운 세 딸 예진(8), 수진(6), 나윤(3)이 있다.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딴 부부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그들의 자녀 역시 관심이 쏠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자녀들이 양궁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양궁은 안 시키려고 한다. 다른 운동은 괜찮지만 양궁을 너무 잘 알기에 시키고 싶지 않다. 양궁을 하더라도 나와 아내 모두 지도자니 개인 레슨을 받을 때 간섭하게 될 수 있다. 이때 아이에게 혼동이 올 것이다. 그래서 양궁은 고려하지 않는다. 첫째 예진이는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 운동 신경이 있는 것 같다. 6세 때 윗몸일으키기를 시켰는데 100개를 하더라. 둘째는 못하는데 유독 첫째는 팔굽혀펴기도 곧잘 한다. 양궁은 아니고 다른 운동은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운동도 본인이 원해야 시키는 것이다. 만약 양궁을 한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진짜 하고 싶어야 된다.”
박경모
2001년 박성현 감독과 첫 만남을 가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박경모 감독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선무당이 사람 잡은, 박경모 감독의 태극마크 첫 메달한국 양궁이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시절 박경모 감독은 93년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가 태극마크를 처음 단 건 취업과 진학의 선택을 앞두고 진로 고민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해 9월 터키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무엇이 무서운지도 몰랐던 신예 박 감독은 세계 무대에 선 것보다 진로 문제가 머릿속에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당시 진학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실업팀을 가야 하나, 체대를 가야하나 고민했다. 경기할 때 집중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세계 대회에 처음 나갔을 때 사시나무처럼 떨었다는 남들처럼 긴장하진 않았다. 고민을 안고 경기를 거듭하다 결승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함께 출전한 형들과 상담하며 고민을 해결했다. 결승에서 김경호 선배와 붙었는데 그땐 떨렸다. 외국 선수와 할 땐 실감을 하지 못했는데 선발전에서 붙은 한국 선수를 상대하니 세계대회 결승에 오른 것을 실감했다.”
박경모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남자 개인전에서 박경모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제공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좀 더 집중했더라면…아직도 기억에 남는 2008 베이징 대회 개인전박경모 감독에게 선수 시절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2008 베이징 대회 양궁 개인전이다. 그는 2004 아테네올림픽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해 다음 대회에 출전했다. 단단히 준비한 박 감독은 결승까지 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 대표 루반 빅토르와 단 1점 차이로 금빛 메달을 놓쳤다.“아쉽게 2등에 그쳤지만 준비를 잘 해서 결승전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다. 결승전 당시 잠깐 너무 잘하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기고 있을 때 3엔드부터 타이밍이 길어졌다. 그때 좋은 성적을 거뒀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길어지면서 실수가 나왔다. 점수를 앞서는 상황이었지만 잘 하려다 보니 몸이 더 경직된 것 같다.”아쉬운 기억을 남긴 박 감독은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오른쪽 중지의 관절염으로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박 감독은 2008 베이징 대회 개인전을 더욱 아쉬워했다.“2004년 단체전 금메달을 따고 다시 올림픽에 가면 개인전은 내가 꼭 금메달을 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완점을 알았기에 충분히 자신 있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체력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남들 쉴 때도 더 운동했다. 체력훈련으로 크로스컨트리를 뛸 때 2004년에도 열심히 뛰었지만 2008 베이징을 준비하면서 더 이를 악물었다. 개인전에서 한 번 놓친 기억이 있기에 오르막을 오를 때도 이걸 올라야 금메달을 딴다고 생각하며 뛰어올라갔다.”
박경모 박성현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당시 올림픽방송 최초 양궁 부부 해설위원으로 나선 박성현과 박경모(오른쪽) 감독 제공 | SBS
◇한국 스포츠사 최초 올림픽 중계한 부부 해설위원박경모 박성현 부부가 2016 리우 올림픽에서 해설위원으로 나서기 전까지 한국 스포츠사에서 부부가 해설위원을 맡아 경기를 중계한 적은 없었다. 남녀 금메달리스트가 해설을 했기에 정확했고, 부부가 중계했기에 특별했다. 하지만 부부 해설위원이 탄생한 데는 한 가지 비화가 있었다.“원래 해설위원 제의는 내게만 들어왔다. 처음에는 SBS PD의 제의를 거절했다. 한 달 정도 시간을 달라고 한 뒤 고민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SBS PD가 알고 보니 고향 선배더라. 내가 해설위원직을 사양하니깐 공주까지 내려와서 설득했다. 그래서 ‘나와 아내가 함께 해도 되겠냐’고 물어봤고 허락해줘서 함께할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설 또한 경험이기에 아내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게 낫고, 모르는 사람과 경쟁하는 것보다 서로 보완할 수 있겠더라. 아마도 2020년 도쿄 때도 함께 갈 것 같다.”
박경모
공주시청 박경모 감독(왼쪽 첫번째)이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공주 |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칭찬받는 한국 양궁에서 미래를 꿈꾸는 박경모 감독한국양궁협회는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단체다. 공정한 운영으로 청렴함의 지표가 되고 있다. 양궁은 부패가 끼어들 수 없는 시스템을 오래 전에 구축했다. 모든 선발 과정을 공개해 잡음이 생겨나지 않게 했고 이 때문에 학연, 지연이란 단어를 물리쳤다. 협회 고위 관계자가 선수 선발권을 흔들고 싶어도 손대기 힘든 시스템이다. 한국 양궁이 곧은 길로 걷는 데는 1980년대부터 이어온 회장사의 절대적인 지원이 밑바탕이 됐다. 덕분에 지도자들 역시 공부에 매진하는 분위기가 마련돼 한국 양궁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대한양궁협회에서는 매년 12월 2박3일 세미나가 있다. 초·중·고·대·일반까지 모두 모여서 전체 양궁에 관해 문제점이 있으면 토의를 하고 정보 교류를 한다. 외부 강사를 초청해 심리, 교양 등을 교육한다. 양궁은 장비를 사용하기에 이 정보 또한 기술 발전에 도움을 준다. 새로운 기술 정보가 나오면 세미나를 통해 업데이트한다. 컴파운드(compound·활 끝에 도르래를 장착해 케이블로 연결해 놓은 뒤, 활을 당겼을 때 기계적인 힘으로 발사되는 활)의 경우 우리가 뒤처져 있었지만 세미나 때 잘하는 선수가 와서 컴파운드에 관해 시범을 보이고 강의를 하면서 많이 성장했다.”하나에만 매진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된 환경에서 박 감독 역시 공부하는 지도자로서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때론 자신의 지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선수들을 지도한지 10년째다. 아직 대표 선수를 만들지 못했는데 제자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 그중에서 세계대회나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메이저 대회에 나가서 내가 했던 경험을 제자들도 느꼈으면 한다. 더 큰 목표가 있다면 나도 같이 대표팀에 지도자로 합류해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다. 그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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