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범
‘형컴’ 김형범이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남양주|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남양주|글·사진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아름다운 축구를 일컬어 ‘뷰티풀 풋볼’이라고 한다. ‘뷰티풀 풋볼’을 만드는 요소 중 제일 으뜸인 건 프리킥이다. 정지된 상황에서 경기장 안 모든 시선이 키커의 발에 집중될 때 터지는 골이야말로 통쾌함을 안기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킥을 차는 키커에게 ‘스페셜리스트’라는 칭호를 부여하는데 김형범(34)은 현역 시절 아름다운 프리킥을 14골이나 터트렸다. 35골을 넣은 그의 프로통산 득점 절반에 이르는 수치다.

김형범은 팬들의 뇌리에 아름다운 프리킥을 차는 ‘스페셜리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왼발의 달인’으로 불리는 염기훈이 이번 시즌 국내 선수 프리킥 최다골(15골) 기록을 깨기 전까지 그의 기록은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난 2013년을 끝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K리그 무대와 작별한터라 더욱 의미깊은 기로이다. 그의 날카로운 오른발을 두고 데이비드 베컴의 킥력과 같다며 팬들은 그를 ‘형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느 순간 팬들의 기억 속에서 돌연 사라졌던 김형범은 최근 김병지 해설위원의 유튜브채널 ‘꽁병지TV’를 통해 소식을 전했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다시 축구로 복귀 중인 김형범을 만나 그의 현역 시절 영광의 순간과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김형범
형컴 김형범.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김형범은 다시 축구로 돌아오는 중

김형범은 현역 시절 잦은 부상 탓에 10년간의 선수 생활 중 제대로 시즌을 소화한 기간이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컨디션이 최고에 오를 때쯤 귀신같이 찾아오는 부상에 발목이 잡히곤 했다. 지난 2013년에는 경남에서 8골을 기록하며 팀의 잔류를 이끌었지만 시즌 뒤 훈련을 하다 리스프랑 관절(Lisfrancsches Gelenk·다섯 개 발가락 상부에 있는 족부 관절), 즉 발등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태국 부리람 유나이티드행을 선택했다.

“당시 이흥실 수석코치가 ‘따뜻한 나라에 가서 운동하는 게 도움 될 것 같다’는 조언을 해줬다. 마지막으로 시험 삼아 태국으로 향했다. 실제로 근육엔 무리가 없었지만 이미 부상으로 손상된 부위가 문제였다. 국내에 있을 때처럼 무릎에 물이 차고 통증을 안고 뛰어야 했다. 국내로 복귀한 후에도 함께 하자는 팀이 있었으나 정상적이지 않은 내 몸이 오히려 민폐일 것 같아 사양했다.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은퇴한 김형범은 다른 선수들처럼 지도자를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 전북 현대 시절 동료였던 조재진의 조언에 골프를 시작한 김형범은 골프 사업가로 변신했다.

“골프에 흥미를 느꼈고 비전을 봤기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축구로 돌아오기 위한 발판이었다. 갑작스럽게 은퇴하게 되면서 모든 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는 가장이었기에 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 이제 상황이 정리돼서 내가 없어도 사업이 운영될 수 있게 아내에게 일임하고 70~80% 이상 넘긴 상황이다. 내가 걱정 없이 축구로 복귀하기 위해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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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범이 손가락 하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김형범,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한 제 2의 삶 시작

한동안 사업가로 돌아갔던 김형범은 최근 ‘꽁병지’를 통해 축구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친정팀 전북의 레전드 초청 행사에서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여러 스킨십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팬들에게 돌려주며 그동안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프로축구연맹에서 자리를 마련한 유소년 축구 클리닉에 이상윤(해설위원) 유상철(전 전남 감독) 박동혁(아산 무궁화 감독) 현영민(해설위원) 조재진(전 전북 선수)등과 참여하기도 했다.

“선수 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은퇴하고 나서 실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내 근황도 알리고 유튜브 활동으로 팬들과 스킨십도 하고 있다. 프로축구 연고팀이 없는 지역인 전남 영암을 찾아 1박2일간 유소년 축구 클리닉을 진행했다. 두 번 다녀왔는데 모두 합쳐 500여 명의 학생들과 만났다. ‘K리그 레전드’라는 칭호를 달고 다녀왔는데 그 수식어에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했다.”

선수 시절 큰 사랑을 받았던 만큼 김형범의 은퇴 이후의 삶도 축구 팬에게 큰 관심거리다. 선수 시절 비시즌에는 부상당한 몸을 관리하기 바빴던 김형범은 지난 7월에야 유소년을 지도할 수 있는 C급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본격적으로 지도자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내년에 B급 라이선스를 따고 A급까지 취득할 계획이다. 그새 좋은 제의가 온다면 지도자를 할 수도 있다. 이번에 C급 라이선스를 준비하면서 유소년의 중요성, 한국 축구의 나아갈 길을 배웠다. 내가 유소년을 지도하게 된다면 단발성에 끝나지 않고 그 아이가 프로에 갈 때까지 키우고 싶다. 손흥민이 그의 아버지에게 배워 성공했듯이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집중적으로 선수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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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범이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초창기 ‘닥공(닥치고 공격)’ 이끈 김형범이 말하는 ‘닥공 축구’

김형범은 지금의 전북현대가 보여주는 완성형 ‘닥공’이 있기까지 기반을 다졌다. 지난 2006년 최강희 감독의 부름을 받고 울산 현대에서 전북으로 트레이드 된 김형범은 이적 초기 전북 팬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당시 팀 주축이었던 박동혁, 박규선과 맞트레이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형범은 첫 경기에 팬들의 쓴소리를 환호로 바꿨다. 전북 이적 후 첫 경기였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조별리그 감바 오사카(일본)와 경기에서 0-1로 뒤지던 후반 교체 투입돼 2골을 터트리면서 홈팬들에게 첫 승리를 안긴 것. 김형범은 조별리그 6경기에서 5골을 넣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전북이 ACL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에 출전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지금은 ‘강희대제’로 불리며 중국 톈진 취안젠으로 박수받으며 떠난 최강희 감독은 ‘닥공 축구’ 초기부터 성공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김형범은 최 감독이 지도자로 성공할 수밖에 없던 비결을 설명했다.

“‘닥공’의 힘은 수비였다. 최 감독이 가장 강조했던 게 공격수도 수비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조재진, 스테보, 이동국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와도 똑같았다. 가끔 이동국이 수비 열심히 하는 장면이 보인다. 2008년에는 최전방 공격수였던 조재진이 페널티박스까지 내려와서 수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측면 공격수였던 나 같은 경우 상대 측면 공격수가 우리 페널티박스까지 들어오면 그것까지 전부 따라가라고 주문받았다. 어떻게 보면 힘든 부분이었지만 최 감독은 ‘90분 다 뛰라는 게 아니다. 45분을 뛰어도 좋으니 수비에 참여하라’고 주문했다. 외국인 선수라고 수비 안 하는 것도 용납 안 했다. 공격수들의 헌신적인 수비 참여도가 공격적으로 빛나는 것이다.”

최 감독이 국내에서 ‘명장’ 반열에 오른 것 역시 김형범의 기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형범이 기억하는 최 감독은 팀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선수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면서 팀과 상생할 수 있는 축구를 구사했다.

“보통 공격수면 공격을 70~80% 하고 수비를 20~30%를 해야 한다. 그런데 최 감독은 ‘공격도 100%, 수비도 100% 하라’고 주문하시더라. 솔직히 수비를 100% 하면 공격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최 감독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며 북돋았다.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알겠더라. 100% 하라는 건 90분 동안 하라는 게 아닌 60분이든, 70분이든 100% 하다가 손들고 교체돼 나오면 되는 거였다. 그만큼 경기에 헌신하라는 말이다. 그런 주문을 다 소화해 팀에 기여도가 높았다면 한층 더 좋은 선수가 됐을 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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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김형범이 예리한 프리킥을 차고 있다.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김형범, 부상에도 그림 같은 킥 성공한 ‘프리킥의 마술사’

김형범 하면 부상이라는 꼬리표를 떼려야 뗄 수 없다. 하지만 부상으로 뛰지 못했던 시간을 채워줄 만큼 그가 활약한 순간은 예술 그 자체였다. 그는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상대 선수를 제치는 드리블을 보여줬다. 여기에 한 방씩 터지는 그림 같은 프리킥이 방점을 찍었다. 그 모습은 은퇴했음에도 김형범이 K리그의 대표적인 ‘스페셜리스트’로 손꼽히는 이유다. 현역 시절 14번의 프리킥으로 상대 골문을 열었던 김형범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리킥으로 지난 2007년 3월 11일 열렸던 K리그 홈개막전 수원 삼성과 경기를 꼽았다. 당시 그는 그림 같은 곡선을 그리며 골문 구석에 꽂히는 프리킥을 성공했다.

“슛과 킥에서만큼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그만큼 프리킥에 자부심이 강하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프리킥은 부상 중 넣은 골이다. 수원과 홈 개막전에서 전반전 초반 이미 김남일의 태클로 무릎 내측 인대가 손상된 상황이었다. 테이핑으로 부상 부위를 감을 때부터 이미 나는 이 부상으로 몇 경기를 쉬어야 한다는 걸 예감했다. 이 경기를 마저 소화하고 싶은 욕심에 더 뛰었다. 전반 종료 직전 수원 골문 앞 왼쪽에서 프리킥을 얻어 염기훈과 공 앞에 섰다. 부상 부위 때문에 찰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가 차겠다고 말한 뒤 찼다. 부상이 있는 상황에서 넣은 골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늘 경기 뒤 킥하는 모습을 확인하는데 그날따라 모션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멋있기보다 부상 상황에서 넣은 골이기에 강하게 남는 기억이다.”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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