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지난달 2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는 때아닌 '듣보잡' 논란이 불거졌다.


이날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곽용운 대한테니스협회장을 향해 인수위원장에 친인척을 임명하는 등 테니스계를 농단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테니스계의 듣보잡'이라고 칭했다. 이에 곽 회장이 "제가 잡놈이냐" "이 잡놈이 얘기 드리겠다"고 맞서면서 대중의 입방아에 올랐다.


국민의 반응은 싸늘했다. 협회장이 국감장에서 국회의원과 말장난을 벌이는 모습은 그 자체가 실소를 자아냈다. 문제의 본질과 상관없는 몇 단어가 화제가 되면서 협회를 둘러싼 여러 의혹은 여론의 뭇매를 피해가기도 했다. 지난 1월 정현이 호주 오픈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한껏 높인 한국 테니스의 명예가 국감장에서의 말 몇 마디로 실추되는 순간이었다.


한국 테니스는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다. 엘리트, 생활체육 통합 테니스협회가 출범한 지 3년이 가까워지지만 가시적인 시너지 효과는 요원하다. 협회가 내홍과 외홍을 연달아 겪는 가운데 일찌감치 준비해야 할 '포스트 정현' 육성도 우려를 사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머물러 있던 이형택이 한국을 찾았다. 국제 무대 속 한국 테니스의 길을 개척했던 그는 명암이 뚜렷했던 2018년의 한국 테니스계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포츠서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전했다.


이형택은 먼저 "미국 오렌지카운티의 헌팅턴 비치에서 테니스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스크린테니스를 이용한 모 스마트체험교육시스템의 전속 모델로 활동하며 최근 광고를 촬영했다"고 근황을 전했다.


미국에 체류하며 한국 테니스계와 한걸음 떨어져 있었던 만큼 최근 상황에 대한 애정어린 걱정도 컸다. 국감에서의 소란을 지구 반대편에서 뒤늦게 알게 된 그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 국감장에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이어 "얼마 전 육군사관학교 테니스 코트를 두고 말이 많았다. 이를 둘러싸고 30억원 대여금 반환 소송에 패소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국감에서 오간 이야기까지 여러 말이 많은 상황에서 새 집행부가 들어선 협회와 한국 테니스계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는 집행부를 둘러싼 시시비비와 자질 논란뿐 아니라 '진짜 본질'인 테니스계 현안을 꼬집었다. "현재 어린아이에게 다른 운동이 아닌 테니스를 권하며 '테니스 선수가 되면 이런 게 좋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는가?"라는 반문으로 본론이 시작됐다. 테니스에 자부심이 있는 이라도 쉬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올초 '정현 붐'으로 라켓을 손에 쥔 아이들이 늘어났지만 비전이 없어 다른 종목으로 전향하거나 스포츠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테니스의 길을 걷기로 택해도 문제다. 이형택은 주니어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시스템 역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동길 전(前) 회장 시절에는 주니어 선수들에게 코치가 붙어 1년 내내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권순우 홍성찬 정윤성 같은 선수들이 그때 주니어 시절을 보낸 선수들이다"라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형식적인 캠프 프로그램만 있을 뿐 지속적인 케어를 받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주니어 시절이 지나도 열악한 상황은 여전하다. 가장 좋은 예가 한국선수권이다. 한국선수권은 1964년 시작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국내 최고의 테니스 대회다. 그러나 지난 대회에서는 국가대표급 상위 랭커들이 대거 결장했다. 주원홍 前 회장 시절이었던 2014년까지만 해도 상금을 1억원으로 올리고 서울에서 개최하는 등 대회 부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상금도 절반으로 줄었고 지방보조금을 받기 위해 양구 등 흥행과 거리가 먼 지역에서 열린다. 홍보도 미진해 테니스를 좋아하는 팬조차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다.


이형택은 "전일본 대회는 우승 상금이 4000~5000만원에 이른다. 준우승만 해도 용품 스폰서가 들어온다"라며 "한국선수권은 그야말로 한국 테니스의 상징적인 대회다. 여기서 현실을 알 수 있다. 협회가 적극적으로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선수권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엘리트 대회 개최를 목적으로 받은 국고지원금을 편법을 통해 생활체육 대회를 개최하는데 전용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기도 한다.


이와 함께 프로화에 대해서도 소리를 높였다. 그는 "전국체전 문제가 엮여 쉽지 않은 것은 안다. 하지만 전국체전은 전국체전대로, 프로는 프로대로 길을 열어야 한다. 그럼 오히려 파이를 키우는 효과도 볼 수 있다"라며 "물론 많은 실타래를 풀어야 하고 뒤따르는 단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율하면서 방안을 찾아야지 '그건 현실적으로 힘들다'라며 손을 놓고 있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또한 "외국에서는 한국 선수들을 보고 '테니스는 개인 종목인데 왜 팀으로 움직이냐'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이 역시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라며 "선수들이 개인 경기까지 팀 단위로 움직이면 비용이 배로 커진다. 이러면 기업이나 지자체에서 엘리트 테니스에 지원을 하려다가도 한 번 더 고민하는 케이스가 생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금 제도와 같은 선수 복지도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론 보험이나 연금을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코치도 보험에 든다. 부상을 당하면 돈이 나온다. 남자프로테니스(ATP)는 경우는 기준에 따라 연금을 준다. 나도 받을 예정이고 정현도 아마 기준을 달성했을 거다. 복지와 명예를 모두 잡는 셈이다. 이렇듯 여러 방법으로 차별성을 만들 수 있다"라며 "나도 솔직히 보험이나 연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협회가 나서 전문가와 상담하고 실현 가능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저 '현실적으로 힘들다. 안 된다'라고만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라고 부연했다.


이형택은 "테니스 선수로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할지언정 이런 복지와 안전장치가 갖춰져 있다면 어린아이들이 테니스 라켓을 잡게 유인할 수 있다"고 조언한 뒤 "스타 선수가 없을 땐 솔직히 이런 일을 해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스타 선수도 있지 않은가"라며 정현을 언급했다.



정현의 이야기가 화두로 오르자 애정이 넘치는 이야기를 펼쳤다. 그는 정현의 고질적인 물집 문제를 꺼내며 "나도 물집으로 고생했다. 2008년 데이비스컵 필립 콜슈라이버와 경기에선 양쪽 발에 물집이 다 잡히기도 했다. 물집이 생기면 어떻게든 계속 뛸 수는 있지만 정상적으로 게임을 운영할 순 없다. 오른발에 물집이 잡히면 왼쪽 발에 힘이 들어가고, 그러면 보디 밸런스가 무너진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잦은 기권에 대한 여론의 우려는 단숨에 일축했다. 그는 "정현 정도 레벨이 되면 발 상태가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경기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여기서 무리하면 오히려 컨디션이 장기적으로 망가진다"라며 "우린 정현 하나만 바라보니 기권할 때마다 걱정하지만 세계적으로 관점을 넓히면 몸 상태의 사소한 변화를 이유로 경기에서 기권하는 선수들도 수두룩하다"라고 전했다.


특히 "계속 1회전에서 지다가 다음 대회에 우승할 수도 있고,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다가 다음 대회에 1회전에서 탈락하는 게 테니스다. 몸이 망가지는 걸 무릅쓰고 무작정 끝까지 버티는 게 과연 '아름다운 스포츠정신'일까"라고 반문했다.


daeryeong@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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