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200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슈퍼파이널 3000m 레이스가 끝난 후 여자부 개인종합 챔피언의 자리에는 만 16세 여고생 진선유의 이름이 새겨졌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진선유는 한국 쇼트트랙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열린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는 1000m, 1500m, 3000m 계주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초로 동계올림픽 3관왕을 차지했다. 이어진 2006년과 2007년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속으로 개인종합 우승을 따냈다. 세계선수권 3연패. '전설' 전이경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었다.


그리고 약 10년이 흐른 현재. 지도자가 된 진선유는 여전히 현장 일선에서 조용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가을 기운이 완연한 단국대학교 캠퍼스에서 '코치' 진선유를 만났다.


◇수영을 배우던 소녀, 얼음 위의 스타가 되다


스케이트화를 처음 신은 건 왜였을까. 그는 "원래는 수영을 배우고 있었다"라며 "방학 특강으로 처음 빙상장에 갔다가 본격적으로 쇼트트랙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어린 나이에 걷게 된 운동선수의 길이 쉽지 만은 않았을 터. 진선유는 "거의 빙상장에 살다시피 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라면서도 "어머니께서 '힘들면 그만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이 오히려 자극이 됐다.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운동을 했다"라고 어머니의 자극을 원동력 삼아 성장했다고 밝혔다.


주니어 세대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진 못한 진선유는 2005년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시 나이 만 16세. 그는 "세계선수권 메달은커녕 대표팀 선발도 사실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고 회상하며 "힘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열심히만 하다 보니 운이 좋아 대표팀에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알려지지 않은 선수다 보니 비교적 견제가 적었고, 그래서 우승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대망의 토리노 올림픽. 앞선 대회로 단숨에 금메달 기대주로 떠오른 진선유는 무려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거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금의환향했다. 그는 "올림픽에 나간다는 자체도 부담이 됐는데 금메달 이야기가 나오니 부담이 컸다. 하나만 따자는 생각이었다"라고 대회를 앞둔 당시를 되돌아봤다.


초반은 좋지 않았다. 500m에서 준결승에도 못오르는 부진을 겪었다. 주종목은 아니었지만 첫 경기였던 만큼 이후 경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진선유는 "500m에서 좋지 않았는데 하필 라이벌 왕멍이 금메달을 땄다. '아, 이번 대회 망했다' 싶더라"라며 웃은 후 "500m가 안 좋으니 주종목인 1500m에서도 부담이 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라고 털어놨다. 그러나 결과는 3관왕. 오롯이 실력으로 따낸 성과였지만 "주위에서 많이 도와줘 세 개나 따낼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부상에 꺾인 '세계 1위'의 날개


진선유는 올림픽을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쇼트트랙 세계 1위이자 '올림픽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권좌에서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반짝 스타가 아니라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채찍질 속에 더욱더 운동에 매진했다. "실력도 오히려 올림픽 이후에 더 좋아졌던 것 같다. 정신이 해이해질 틈도 없었다"는 그의 말은 기록으로도 나타났다. 올림픽 이후 진선유는 2006, 2007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하며 전이경의 세계선수권 3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운동선수에게 불의의 부상은 항상 컨디션이 최고조일 때 찾아온다. 진선유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매 대회 집중 견제를 받던 그는 2007~2008 월드컵 6차 대회에서 중국 선수의 의도적인 반칙에 떠밀려 발목을 다쳤다. 진선유는 "'잠깐 아프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보니 발목이 엄청나게 부어있었다"고 안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


오른쪽 발목 바깥쪽과 안쪽 인대가 모두 손상되는 큰 부상이었다. 선수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겪는 장기 부상. 수술을 하지 않고 버티려 했으나 회복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뒤늦게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바로 수술을 받았으면 밴쿠버 올림픽 출전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결국 진선유는 부상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한 채 2011년 은퇴했다. 이른 은퇴 결심에 아쉬운 목소리도 컸지만 정작 자신은 "평소에도 정상에 있을 때 일찍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선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다"고 쿨하게 답한 후 "사실 운동을 하면서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지쳐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을 은퇴 무대로 장식하고 싶었는데 나가지 못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선유의 시계는 아직 돌아간다


진선유는 "은퇴하면 얼음 위를 완전히 떠나려고 했다"라며 웃었다. 그러나 모교 단국대학교는 그에게 코치직을 제의하며 지도자로 남아주길 바랐고, 은퇴 후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코치로서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코치' 진선유는 "예전에는 무조건 체력을 강조하며 단순하게 훈련했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훈련하는 시대"라며 "나도 '과거의 훈련'을 받아온 사람이라 '현재의 훈련'을 받고 성장해온 선수들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래서 자주 부딪히기도 했다"라고 이야기했다.


문제를 해결한 것은 소통이었다. 그는 "대화를 하면서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유하게 소통하며 지도하려 한다"라고 전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였지만 '나만 맞다'는 권위 의식도 버렸다. 진선유는 "모든 선수들은 스케이트를 타는 폼부터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 나의 방식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참고하라는 뜻에서 경험적인 부분만 이야기해줄 뿐"이라고 철학을 밝혔다.


'10년 후의 진선유'에 관한 질문에는 "유부녀가 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웃었다. 그러나 마냥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무거운 말이었다. 그는 "사실 그 부분이 힘들다. 운동선수들은 당장 눈앞의 성적만 바라보고 달린다. 그러다가 은퇴하면 하고 싶은 게 없다. 그야말로 사회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이라며 "그래서 항상 제자들에게도 운동 외에도 하고 싶은 것을 가지라고, 꿈을 생각해 보라고 일러둔다"고 속 깊은 면모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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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대령기자 daeryeong@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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