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현
해태 시절 조계현. 스포츠서울DB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최민지기자] ‘싸움닭’부터 ‘팔색조’까지 그라운드 위에 오른 그를 부르는 별명은 많았다. 1990년대 해태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은퇴 후엔 수석코치에 이어 구단 최초 선수 출신 단장까지 올랐다. 그 주인공은 바로 KIA 조계현(54) 단장이다. 오랜 시간 야구와 함께하고 있는 조 단장을 만나 그의 야구 인생을 들여다 봤다.

조계현
해태 시절 조계현. 스포츠서울 DB

◇ 진지하게 타자 전향을 고민했던 그때 그시절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인 조 단장은 고교 1학년 때 부터 이미 이름을 날렸다. 대통령기, 청룡기 등 각종 대회 우승 이끌며 고교야구에서 가장 화려한 별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에이스의 혹사는 숙명이었다. 혹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각 팀 에이스들은 팀이 원하면 언제든 마운드에 올라야했다. 조 단장 역시 그랬다. 그는 “당시엔 에이스들이 많이 던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혹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무조건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야했고 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공을 쥐어주기만 하면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마인드로 철저히 무장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강행군은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기 마련이다. 조 단장은 “그러다 보니 고교 3학년 때는 팔이랑 어깨가 안 좋아서 거의 볼을 못 만졌다. 1983년 인천 전국체전에서 던지고 연세대에 진학을 하긴 했는데 공을 던질 때 잡아채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손에서 자꾸 빠지는 듯했다.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고 돌이켰다. 이대로는 투수로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조 단장은 진지하게 타자로 전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프로에 가서 투수로 활약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감독님께 타자를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때부터 방망이를 치기 시작했는데 곧잘 쳤다. 프로에서도 투수보단 방망이를 치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김봉연 선배도 내 몸상태를 잘 알고 있었는데 ‘너는 프로에 오면 투수를 하지말고 타자로 뛰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마음 먹은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

◇ 머리카락이 쭈뼛! 투수 조계현을 있게 한 날

그러나 조 단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프로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그 배경엔 드라마 같은 얘기가 숨어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조 단장은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뼛조각이 신경을 건드려 무리가 왔던 탓이었다.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뼛조각만 5개를 제거했고 그러고 나서 해태의 지명을 받았다. 타자로 전향을 생각하고 있던 조 단장이지만 익히 우리가 알고 있듯 그는 투수로 입단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조 단장은 “계약 조건을 봤는데 타자로 계약하는 것보다 투수로 계약하는 편이 계약금이 더 많았라. 당시에는 의료분야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내 팔 상태를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계약금 때문에 투수를 선택했고 안되면 타자로 전향하자는 생각이었다”고 뒷얘기를 밝혔다.

그렇게 2월 말 팀에 합류해 캠프 가기 전에 조 단장은 선배들과 연습을 했고 다른 투수들이 툭툭 던지는 걸 따라서 공을 던졌는데 어느 순간 느낌이 왔다. “세 개 정도 던졌는데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손에 공의 실밥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지난 6년 동안 한 번도 못느꼈던 감각을 그때 느꼈다. 입단해서 3일째 훈련하는 날이었다. 코치님께 말씀드리고 제대로 피칭을 해봤고 고등학교 때도 호흡을 맞춘 적 있는 장채근 포수가 공을 받아줬다. 끝나고 물어보니 고등학교 1학년때 만큼은 아닌데 공이 살아 있다고 하더라. 되게 신기했다. 뼛조각을 제거한 덕분에 좋아진 것인지 모르겠는데 정말 신기했다. 이후 점점 구속도 올라갔고 그렇게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다.”

조계현
해태 시절 조계현. 스포츠서울DB

◇ 싸움닭에서 팔색조로

조 단장은 고교 시절부터 타자들과 승부를 피하지 않고 빠른 공으로 승부해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프로 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빠른 공 보다는 다양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컨트롤을 앞세웠고 별명은 ‘팔색조’로 바뀌었다. 그 배경에 대해 조 단장은 “1992년도에 선동열 선배가 다쳐서 내가 대신 마무리 투수로 나선 적이 있다. 12세이브를 했는데 시즌을 끝마치고 나니 너무 힘들더라. 26세에 뒤늦게 프로에 들어왔고 팔꿈치도 안좋은 상태였지 않나. 한 시즌 200이닝씩 던져야 하는데 과연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더라.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컨트롤이 있으니 스피드를 줄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실천에 돌입했다. 조 단장은 “그해 캠프가서 스피드를 4~5㎞ 떨어트린 138~140㎞대로 피칭을 하고 변화구를 던지니까 쉽고 편했다. 당연히 체력도 세이브됐다. 당시만 해도 모두 전력으로 던질 때라 낯설었는지 시범경기에서도 타자들한테 잘 먹히더라. 그렇게 변화를 줬던 시즌에 17승으로 다승왕에 올랐다”며 “완투할 때도 7회까지는 힘을 빼고 던지다가 8~9회 마지막 2이닝 정도는 145㎞대로 세게 던져서 경기를 끝냈다. 요즘 말로 완급조절을 했던 것”이라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

스피드가 아닌 타이밍 싸움을 해야 하다보니 변화구 종류도 점점 더 늘려가야 했다. 조 단장은 “어렸을 때부터 변화구 감각은 좋았다. 커브나 포크볼도 한 번 던져봤는데 잘 떨어지더라. 포크볼은 특히 대학 시절 동아대학교와 경기 때만 한 번 던졌는데 삼진을 14개 이상 잡았다. 이건 프로가서 써야겠다 싶어서 아껴놨다가 프로 2년차 때부터 다시 포크볼을 던졌다.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른데 난 변화구 감각이 좀 있던 것 같다. 그래서 1993년도부터 싸움닭에서 팔색조로 별명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팔색조’에게도 물론 던지기 힘든 변화구 구종은 있었다. 컷 패스트볼이 그것이다. 조 단장은 “일단 서클 체인지업은 공을 빼내는 동작이 전체적인 내 팔 스윙에 도움이 안 되겠다 싶어서 안 던졌다. 컷 패스트볼은 시도를 해봤지만 팔꿈치를 많이 써야하는 구종이라 팔꿈치가 안 좋은 내가 던지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포기했다. 나한텐 정말 어려운 공이었다. 요즘 선수들은 많이 던지는데 대단한 것”이라면서도 “팔꿈치가 좋았더라도 안 던졌을 것 같다. 체력조건, 유연성에 따라 던질 수 있는 구질이 정해지는데 내게는 컷 패스트볼이 맞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조 단장은 현역 시절 특유의 왼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는 다이내믹한 투구폼으로도 유명했다. 이 역시 전략 중 하나였다. “당연히 만들어야 했던 동작이었다”고 강조한 조 단장은 “나는 스피드가 없으니 타이밍 싸움으로 상대를 잡아야 한다. 키킹도 타자의 눈을 흐트러뜨리게 만드는 요소로 전략적인 동작이었다. 원래 다이내믹한 걸 좋아하긴 했지만 프로에서 스피드를 줄이자 생각하면서부터 폼이 더 강렬해졌다. 유연성이 되니까 나랑도 잘 맞았다. 효과도 많이 봤다. 키도 작고 스피드도 없으니 상대에게 약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키킹 동작이 상대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줬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2011 프로야구 두산-넥센
7일 오후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1 프로야구 두산과 넥센의 경기에서 두산 선발투수 이용찬(오른쪽)이 5회초 1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조계현 코치에게 공을 넘기며 강판되고 있다. 2011-07-17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코치 변신

현역 시절 해태와 삼성, 두산 등 여러 팀을 거친 조 단장은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때도 KIA에서 시작해 삼성, 두산, LG를 거쳐 다시 고향팀으로 돌아올 때까지 다양한 팀을 경험했다. 이적을 ‘쫓겨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조 단장에게 이적은 좋은 기회였다. 그는 “각 팀마다 성향이 다 다르다. 새로운 팀에 가면 내게도 맞춰 주지만 내가 맞춰야하는 것도 많다. 그러다 보면 협력과 소통이 된다. 받아들이고 내주고 이런 게 반복되다 보면 내가 얻는 건 더 많아진다”며 “워낙 얘기도 잘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다보니 각 팀에서 새로운 문화를 익히고 타협하는 법을 배우는 게 재밌었다. 살면서 도움이 정말 많이 됐다. 선수도 그렇고 코치도 그렇고 팀을 이적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지 말았으면 한다. 길게 보면 그게 오히려 훨씬 많은 도움이 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채찍질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라고 힘줘 말했다.

조 단장은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코치 생활을 이어갈 수록 지도 철학도 조금씩 변해갔다. 그는 “코치를 처음 할 땐 코치는 무조건 선수에게 무엇이 됐든 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KIA에서 3년, 삼성에서 4년 하면서 그 생각도 바뀌었다.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주고 받아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두산 시절엔 ‘좀 더 폭을 넓혀야 겠구나’ 깨달았고 LG에서는 선수도 3년마다 성향이 바뀐다는 걸 느꼈다. 다시 KIA로 돌아와 수석코치를 할 땐 ‘저 사람이 나한테 질문을 하게 만들려면 평소에 스킨십이나 가벼운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열게 만들어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든 나한테 하러 오게 만들자는 마인드로 수석코치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현역 시절 ‘팔잭조’ 답게 변화구를 가르쳐 달라며 조 단장을 찾는 선수들도 많았다. 그러나 가르쳐주기 전에 조 단장이 꼭 물어보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나이’다. “현역 때도 많이들 물어보러 왔는데 만으로 29세가 안 된 선수들에게는 변화구를 안 가르쳐 줬다. 20대 선수들은 어깨도 싱싱하고 나이도 어려서 일단 구속을 완벽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다. 변화구는 나이 들어서도 만들 수 있으니 그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좋은 구속이 나올 수 있도록 투구 밸러스에 신경을 더 많이 쓰라고 조언해 줬다.”

물론 현대 야구에서 조 단장이 생각하는 기준 연령대가 훨씬 낮아졌다. 그는 “요즘은 만 24~25세 정도가 되면 변화구를 갖춰야한다. 우리나라 타자들의 기술이 너무 좋아졌다. 대신 자신에게 맞는 변화구를 선택해야 한다. 나한테 맞지 않는데 굳이 무리하게 사용하려다 보면 과부하가 걸린다. 여러가지를 욕심내기 보다는 2~3개 정도 게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 그렇게 되면 타자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해야 한다. 전 타석에 뭘 던졌고, 타구가 어떻게 날아갔고, 밀었는지 당겼는지 여러가지를 계산해서 투구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투수들도 공부를 해야한다. 조 단장은 “우리 때는 피처가 143~144㎞의 스피드로 바깥 쪽 공 반개 정도 빼서 던지면 거의 방망이가 안 나왔다. 근데 지금은 타자들이 그걸 때려서 넘긴다. 신체적 조건도 많이 좋아져 기술에 파워도 더해졌고 투수들이 버티기 힘든 타고투저가 계속되고 있다. 투수는 던질 수 있는 구질이 한 5개 정도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타자는 매일 새로운 구종과 구질을 본다. 대처 능력이 엄청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투수는 타자를 이기려면 정말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 쉴 때도, 게임을 던질 때도 볼배합을 생각해야 한다. 전력분석원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투수들 본인도 타자 심리 등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조계현
KIA 조계현 단장이 18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스포츠서울과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07.18 광주ㅣ서장원기자 superpower@sportsseoul.com

◇ 현장에서 프런트로, 앞으로의 목표

2017년 12월 6일, 조 단장의 야구 인생에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타이거즈 역대 최초의 선수출신 단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현장에서 프런트로 위치가 변한 조 단장은 “현장은 전쟁을 하는 곳인라면 프런트는 전쟁을 하는면서도 현장이랑 소통이 되는, 전략적인 부분이나 여러가지를 논할 수 있는 그런 자리”라고 그 차이를 설명했다. 이어 “현장에서는 내 생각만 딱 갖고 들어가면 되는데 여기서는 내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현장과 늘 협의를 해야한다. 현장 경험이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다르지 않나. 최대한 의견을 많이 듣고 나눌 수 있도록, 신뢰가 더 단단해 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쉽지 않은 자리지만 조 단장은 새로운 자리에도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다. 앞으로 목표나 방향을 묻는 말에 그는 “내가 단장으로 있는 동안 팀이 큰 기복 없이 꾸준히 가는 게 목표이자 방향이다. 부상 크게 안 당하면서 어느 정도 레벨로 쭉 가기를 원한다”며 “현장과 늘 소통해 가면서 우리 선수들의 구성, 가는 방향 등을 협의해 나갈 것이다. 이런 협의를 통해서 안정적인 노선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고 답했다. 팬의 만족감을 채워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조 단장은 “야구는 팬이 즐거워야 한다. 팬이 즐거워하고 좋아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각오도 잊지 않았다.

julym@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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