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유도스타 김재범은 2012년 런던 하계올림픽 금메달로 아직도 국민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그러나 한국 유도사(史)에서 그는 올림픽 금메달 하나로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이뤘다. 


선수 시절 전 세계를 호령했던 한국 유도계에서 두명 뿐인 '그랜드 슬래머'(올림픽·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아시아선수권 우승) 김재범 한국마사회 유도단 코치를 경기도 화성시 동탄의 '김재범유도관'에서 만났다.


▲바비인형 갖고 놀던 소년, 유도 선수가 되다


유도 선수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이미지와 달리 김재범은 어린 시절 과묵하면서도 섬세한 아이였다. 어려운 환경에서 할아버지의 손에 자란 그는 사춘기를 겪을 새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재범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다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누나가 두 명 있다. 누나들의 장난감을 공유하다 보니 바비인형 같은 걸 갖고 놀았다"고 거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밝혔다.


유도를 시작한 것도 유도를 좋아해서라기보단 유도를 하면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끌려서였다. 그는 "유도를 좋아하고 정말 하고 싶어서 들어간 게 아니었다"며 "유도를 시작한 후 물 흐르듯 열심히만 했다. 사춘기가 생길 타이밍도 없이 학창시절이 지나갔다. 부모님이 걱정해도 '괜찮다'라고만 답하고 운동에만 매진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성장해 2004년 11월 이원희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꺾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2005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는 우승을 차지하며 메이저대회 첫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73kg에서 81kg으로 체급을 한 단계 올리는 승부수를 뒀다.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는 "체급을 맞춘다고 7~8kg을 감량했는데 기량이 50%도 안 나왔다"라며 "'힘이 없어서 패배하느니 마음껏 먹어서 최대한 힘을 써보고 패배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큰 결심을 한 계기를 설명했다.


▲주요 대회 금메달만 10개 이상…유도 역사를 다시 쓰다


그렇게 베이징 올림픽에 나선 김재범은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열세로 평가받던 올레 비쇼프에 패하며 금메달을 목에 거는 데 실패했다. 그는 "예선에서 붙었다면 이겼을 것 같다. 결승전에서는 체력적으로 부하가 온 데다가 이미 메달을 확보한 상황이었기에 경기 중에 그냥 빨리 경기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24세의 어린 마음이 날 무너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아쉬움이 남느냐는 물음에는 "물론 후회는 남지만 내가 내 무덤을 판 것이기에 아쉽지는 않다"고 답했다.


절치부심한 김재범은 2010년과 2011년 세계선수권에서 2연패를 달성하는 등 세계 랭킹 1위를 오랜 기간 유지하며 2012년 런던 하계올림픽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몸이 망가지는 부작용도 따라왔다. 올림픽을 앞두고는 무릎부터 어깨, 팔꿈치, 허리까지 사실상 몸의 왼쪽 전부가 기량을 100%를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의사도 출전이 힘들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미 81kg급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그에게 심각한 부상조차도 올림픽 금메달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결승전에서는 4년 전 아픔을 안겼던 비쇼프와 만나 주목을 받았다. 모두가 '기적의 설욕전' 등의 수식어로 김재범의 승리를 축하했으나 정작 본인은 비쇼프를 꺾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비쇼프는 세계선수권대회 등 다른 대회에서는 보통 초중반에 탈락하는 선수인데 올림픽에서만 신기하게 잘했다"라며 웃은 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4년 전 결승전에서는 누구와 만나도 패할 마인드였다면 런던 때는 누구를 만나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선 비결에 대해서는 "훈련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진짜 말 그대로 죽을 듯이 훈련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종일 훈련을 하고 잠들었다"라며 "훈련은 배신하지 않는다. 많이 할수록 반드시 보상을 받게 된다"라고 확신했다.


지도자 김재범의 철학 "선수가 먼저 깨닫게 하는 지도자 될 것"


올림픽 후 은퇴를 선언한 김재범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위해 복귀해 81kg급과 단체전에서 금메달 두 개를 따냈고 2016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김재범이 한국 유도사에 남긴 족적은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그랜드 슬래머 중 이원희가 네 개 대회에서 금메달 하나씩만을 목에 건 것과 달리 김재범은 세계선수권에서는 두 차례,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다섯 차례 우승했고 아시안게임에서는 세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더했다. '전설' 전기영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기록이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전향했다.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현재 한국마사회 코치로 재직 중이다.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 관련 책도 많이 보고 논문도 읽었다는 김재범은 "닦달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지도자가 되겠다"라고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그는 "나는 잘해서 심하게 닦달하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웃으면서도 "옆에 붙어서 끊임없이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선수가 먼저 깨닫고 지도자를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소신을 전했다.


한국 유도계는 김재범이 은퇴한 후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노 골드'의 아픔을 겪은 바 있다. 그는 "외부에서 이미 금메달을 확보한 듯이 선수들을 띄워주고 선수들도 자주 미디어에 노출되다 보니 집중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평가하며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를 한참 앞둔 상황에서 컨디션이 100%가 되어있으면 안 된다. 100%였다가 98%가 되면 '어라?' 하다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기 쉽다. 그러나 0%에서 10%로 올라가면 스스로 몸을 80%로, 100%로 올리게 된다. 몸을 스스로 '제로'로 만들고 끌어올리기 시작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특히 선수 생활 중 한 번은 찾아오는 슬럼프를 겪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따뜻한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슬럼프는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오는 좋은 징조"라며 생각의 전환을 강조했다. 이어 "슬럼프는 잘못해서 오는 게 아니다. 열심히 해서 오는 거다.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만 더 울면서 올라가야 한다. 특정 선수가 잠시 부진하다고 비판하는 건 그 선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옆집 관장님' 김재범


김재범은 한국마사회의 코치로 활동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유도장의 관장으로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음 달 오산 세교신도시에 2호점 개관을 앞둔 그는 "동탄에 유도관을 오픈한 지 1년 됐는데 약 150명이 다닌다. 전국 대회 금메달이 3개씩 나온다"라고 아빠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전했다. 이어 "유도는 상대를 공격해 다치게 하는 스포츠라기보단 덜 다치는 법을 배우고 서로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신사적인 스포츠다"라며 "유아와 입시생부터 취미로 유도를 배우는 직장인들까지 모두 가르친다. 엘리트 체육으로서 유도와 생활체육으로서 유도를 모두 잡고 싶다"고 유도의 보급을 향한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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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스포츠서울DB, 김대령기자 daeryeo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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