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

[스포츠서울 조성경기자]

배우 김희애는 스스로 더이상 꽃이려 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라, 배우이자 인간으로서 더 큰 나무로 자리매김하려 했다.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감독)의 여주인공으로 나서는 김희애는 영화를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여배우로서 지금에 이른 스스로의 삶에 만족해했다.◇‘허스토리’, 일어·부산사투리와의 싸움이었다

영화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재판부와 싸운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화를 담은 것으로, 김희애는 할머니들을 도와 재판을 이끈 문정숙 단장 역을 맡았다. 무엇보다 여장부이자 부산사투리를 쓰면서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실존인물로, 현재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힘쓰는 김문숙 여사를 그대로 옮겨야 해 쉽지 않았다고 김희애는 털어놨다.

“일본어 선생님과 또 다른 선생님, 그리고 극중 배우들이 다 도와주고, 층층겹겹이 ‘놓치지 않을거에요’ 하는 마음으로 했다. 이번에 처음 일어 대사를 해본건데, 하면서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더라. 우리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니까 잘 모르는데, 그거에 초점을 맞춰서 네이티브처럼 대사하려 하면 감정을 놓치고 감정에만 집중하면 네이티브가 들었을 때 ‘저게 뭐야’ 할텐데. 어디에 더 힘을 줘야할지 모르겠더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평소 우아한 매력이 독보적인 김희애라 극중에서 보여주는 중성적이고 드센 캐릭터가 신선하기도 하다. 그러나 김희애는 “돌이켜보면 저도 드세기보단 독립적인 여성을 많이 해봤다. ‘폭풍의 계절’(1993), ‘아들과 딸’(1992),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1990), 그리고 ‘여심’(1986)도 여자의 일생을 쭉 그리면서 성숙해 가는 모습이었다. ‘밀회’(2014)나 ‘아내의 자격’(2012)도 누구의 엄마나 이모가 아니라 한 인간이 성숙해나가는 걸 보여준다. 드세다고 하긴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고 했다.

그렇기는 해도 실존인물이면서 쉽지 않은 이야기를 끌고 가야하는 부담이 있었을텐데 배역을 제안받고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형식적으로는 대본을 받은뒤 2~3일정도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당연히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힘들어서) 안 하겠다고 하면 배우생활 그만둬야죠”라고 한 김희애는 “배우로서 굉장히 아깝고 귀한 작품이다. 더군다나 여배우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으니 더더욱 귀하다”고도 말했다.

◇신비주의 No, 생활인으로 밸런스 찾는다

이번 영화에서 할머니들이 보여준 투쟁과는 다르겠지만,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김희애도 내적인 갈등과 싸움을 해보았을 것이다. 김희애는 “똑같진 않지만, 가장 비슷한게 뭘까 고민하고 (그 인물에) 들어갔다 나오는게 배우”라면서 “교과서적인 대답일진 모르지만, 시험 잘 본 애가 ‘교과서만 봤어요’ 하면 얄밉지만, 우리는 뻔한 대답같지만 대본을 열심히 본다. 100번이고 보면 그안에 정답이 들어있는거 같다. 대본 한권을 교과서처럼 많은 시간 정독하고 깊이 들어가서 정답을 만나는거 같다. 처음에는 좀 낯설지만 그게 저의 고정관념을 뛰어넘게 하는거 같다. 그게 배우다. 처음엔 조금 어색하지만 많은 대본을 보고 숙지하면서 저도 그사람을 점점 이해하게 되고 그모습에 통쾌함이 있다”고 했다.

뒤이어 “배우는 두 부류인 것 같다. 신비주의 또는 생활인. 그런데 나는 배우도 생활인으로 살고 똑같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야 연기할 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 안할 때에는 자연인으로, 누구의 엄마로, 그냥 가정의 한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밸런스가 잘 맞아서 배우로서의 삶도 잘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한다”고 말했다.

말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김희애도 수긍을 하면서 “만족한다. 그게 다 마음 속에 있는거 아닌가.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처럼 말이다. 다 한장 차이다. 돌아보면 다 감사하다. 저 또한 예전으로 치면 고려장 치를 나이에 여배우로서, 어제 3시간밖에 못잤지만,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게 좋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집에서 그냥 계속 쉬어야 한다. 그런 행복감이나 감사함이 있고, 그래서 잘 살고 있구나 한다”고 말했다.

김희애

◇꽃으로 지지 않고, 삼나무로 뿌리 내린다

그렇다고 데뷔초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고백했다. 20대 젊은 시절 소위 ‘책받침 스타’로서 인기를 구가하며 9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중심에 섰던 김희애다. 그러나 김희애는 그시절을 돌아보며 “어둡고, 우울하고, 빨리 그만두고 싶고, 일종의 우울증 같은 거였을 거다”라고 했다. 이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일에 관심이 많은데, 내가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니까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때 지금의 생각처럼 살았더라면, 내 개인적인 삶도 좀더 풍요롭게 했을 것 같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면서 자기 취미생활도 하며 지내는게 참 대단하다 생각한다”고 하면서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족스러워진 건 참 다행”이라고 강조했다.

생각의 전환이 된 계기가 있었을까. 그는 “갑자기 번개 맞은거처럼 그런건 아니고, 서서히 그런거 같다. 사람은 모르는거 같다”면서 “아이들을 낳고 난뒤 다시 일하러 나오면서 일을 좀더 프로페셔널하게 대하게 됐고, 이게 나의 천직이구나 더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작품으로 인연을 맺은 김수현 작가, 정성주 작가, 안판석 감독 등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김희애는 “요즘 드는 생각이 제가 운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은 분들을 만났고, 더 좋은건 제가 20대에 만났어도 좋았겠지만, 나이들어 지금 만나서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영화도 그렇다. 20대 때 했으면 잘 몰랐을텐데, 지금 해서 더 좋고, 여자배우로서 소모적인 게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서, 직업으로서 더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여배우로서 어린 시절 꽃다운 걸 했으면 더 금방 졌을텐데, 뭔가 삼나무처럼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하며 감사해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김희애이기에 또 다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치고 싶은 여배우의 욕심도 날 법한데, 김희애는 단호했다. “전혀요”라면서 “감사하게 마음만 받겠다. 똑같은 거 하면 재미 없다. ‘밀회’는 정말 제 인생드라마인 것 같다”고 말했다.

멜로가 아니더라도 김희애는 다양한 장르에서 아름다운 배우로 빛날 배우가 될 것이 자명하다. 세월의 깊이까지 더한 매력이 김희애의 앞으로를 더욱 기대하게 한다.

cho@sportsseoul.com

사진|YG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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