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김대령기자] 2007년. 세계종목별선수권대회 500m. 34초25. 이강석.


당시 세계신기록이었던 이 기록은 이강석이 지난 1월 전국동계체육대회를 끝으로 은퇴했음에도 아직도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다. 한국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스피드스케이팅 강국으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아직 이 기록은 아무도 깨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강석 코치를 그의 고향과 다름없는 의정부실내빙상장에서 만났다.


이강석은 은퇴 후 쉴 틈 없이 곧바로 선수 시절 몸담았던 의정부시청에서 코치로서 계속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선발전에서 떨어지면서 지도자를 시작하게 됐다. 국내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목표였는데 아쉽고 허무하다"면서도 "지나서 생각해보니 후배들에게 비켜줘야 할 때 비켜준 것 같다"라며 은퇴 후 근황을 전하며 말문을 열었다.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서 한 세대를 풍미했다. 전설은 7세에 YMCA에서 운동에 재미를 들이면서 시작됐다. 그는 "또래보다 운동신경이 좋았다. 수영도 잘했고 스케이트는 1등을 해보기도 했다. 그때 스케이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초등학교 2학년 때 빙상부에 입단했다"고 회상했다.


첫 메이저 국제 대회는 2004년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월드컵이었다. 2부리그 격인 디비전B였지만, 제레미 워더스푼, 시미즈 히로야스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며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이규혁의 빛에 가린 유망주였던 이강석은 이듬해를 기점으로 한국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발군의 스타트는 이때부터 일찌감치 빛을 발했다. 그는 "처음 국가대표가 됐을 때도 국내 선수 중 100m는 내가 제일 빨랐다"라며 "2006년 토리노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한 월드컵에서는 세계 선수들과 견주어도 내가 최고라는 점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실제로 대회 2차 시리즈에서 34초55로 한국 신기록을 경신했다. 3차 시리즈에서는 금메달을 땄다. 세계 순위는 1위와 2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이 기세라면 토리노에서 메달을 목에 거는 것도 따놓은 당상이었다.


결과는 동메달.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김윤만(1992년 알베르빌/1000m)에 이어 두 번째, 500m에서는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 모두가 "깜짝 메달" "스타 탄생" 등의 수식어로 그를 축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토리노를 회상하기 힘들어했다. 그는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스케이트화에 끈을 묶는 부분이 완전히 찢어졌다. 급하게 주변 구둣방에서 수선했지만, 느낌부터가 너무 달랐다. 주행할 때 다리 각도에도 문제가 생겼다. 결국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라며 아쉬워했다.


이 말이 1등을 놓친 선수들이 하는 흔한 변명이 아니었음은 1년 만에 증명됐다. 이강석은 다음 해 세계종목별선수권대회 500m 2차 레이스에서 세계 신기록(34초25)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세계 신기록의 순간. 그는 "전광판에 ‘월드 레코드’라는 글자가 뜨는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닭살이 돋는다. 일본의 가토 조지의 기록을 깼다는 점이 더욱더 기뻤다"라며 "세계 신기록 보유자라는 타이틀은 내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라는 뜻이다. 대회에서 가장 잘 탄 선수에게 주는 올림픽 메달과는 다른 의미로 큰 영예였다"라고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얼음 위에서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를 겨뤄 빙속의 꽃으로 불리는 500m에서 낸 성적이었기에 더욱 뜻깊었다.


다음 목표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이강석은 "당시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까지도 나의 금메달을 예상했다"고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지난 대회에서 장비 문제로 곤혹을 겪었던 만큼 단단히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정빙기가 고장나 2시간 가량 딜레이된 것. 경기 시간에 맞춰 조절해왔던 컨디션이 깨진 것은 물론 집중력까지 잃었고, 결국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이강석뿐 아니라 유력한 금메달 후보들이 모두 컨디션 조절에 실패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모태범의 깜짝 금메달은 기쁜 일이었지만, 두 번의 올림픽을 모두 외적 변수로 망쳐버린 그에게 완전한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후유증이 심했다. 난 500m 세계 최고였다. 세계 신기록도 가져봤다. 그런데 하필 또 내 경기를 앞두고 말도 안 되는 변수가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스케이트도 싫어졌고, 얼음도 싫어졌다.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라고 힘들게 기억을 더듬었다.


절치부심한 이강석은 다시 스케이트화를 신고 2010~2011시즌 월드컵에 나서 500m 4차, 5차 8차 레이스에서 금메달을 따 종합 1위에 올랐다. 이사이 열린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후엔 밴쿠버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급격한 하락세를 탔다. 그는 "‘어차피 난 올림픽에서 4등 한 선수’라는 생각에 갇히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한 번 버텼는데, 그 이후로 급격하게 무너졌다"라며 "기술도 이전과 똑같이 하고, 마인드 컨트롤도 잘한 것 같은데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기술도, 마음가짐도 허물어졌다. 그 결과 슬럼프가 더 심해지고 링크 레코드를 갖고 있는 곳에서 꼴찌를 하고, 월드컵에선 디비전B까지 내려가기도 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부진은 현실이었지만, 그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국내에서 열리는 올림픽 무대에 나서고 싶다는 열망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국가대표에도 도전장을 냈다. 비록 올림픽 무대를 밟지는 못했으나 아름다운 도전은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 그리고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동계체전. 선수 이강석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스케이트화가 아닌 마이크를 차고 해설위원으로 평창을 밟은 이강석은 자신이 보좌하는 의정부시청의 제갈성렬 감독과 시청률 대결을 벌였다. 그는 "감독님의 여유롭고도 재미있는 해설이 부러웠다"라면서도 "난 대회 직전까지 선수로 뛰었기에 이 장점을 살리는 해설을 하려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다. 감독님도 시청률에서 이겨봤다"고 웃었다.


은퇴 후 약 3개월. 선수라는 꼬리표를 떼고 인생 제2막을 연 이강석은 이제 새로운 꿈을 꿔야 한다. 그는 두 가지 꿈을 이야기했다. 먼저 "난 스포츠의 도움을 받아 스포츠로 이렇게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자리까지 올라섰다. 스포츠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그 일환으로 한국유소년스포츠협회에서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공익사업도 해보고 싶고, 쉬는 시간에는 봉사도 하고 싶다"라고 '인간' 이강석으로서 계획을 밝혔다.


이어 "아직도 내 한국신기록이 안 깨졌다. 내가 가르친 선수가 내 기록을 깼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다시 나의 기록을 깬 셈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며 지도자 이강석으로서 소망도 이야기했다. 세계 최고를 꿈꾸는 어린 선수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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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김대령기자, 스포츠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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