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용인=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컴퓨터 세터' '황금손' '마술사' 그를 수식하는 이름은 많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오랜 시간 한국 배구의 중심에 있었던 주인공은 김호철(62)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그는 선수시절 국내 무대에서 활약하기보다 주로 해외에서 이름을 알렸다. 김 감독은 실업리그였던 금성통신과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뛴 게 전부였지만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쌓고 돌아와 한국 배구 발전에 힘을 보탰다. 지금은 배구 국가대표팀 최초의 전임 감독을 맡아 한국 배구 미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스포츠서울은 최근 김 감독과 만나 선수 시절부터 현재까지 한국 배구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탈리아 배구 중심을 주름 잡던 키 작은 동양인
김 감독의 신장은 175㎝. 가뜩이나 큰 선수가 즐비한 유럽 무대에서 김 감독은 더 조그맣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력과 자신감으로 이탈리아 무대를 장악했다. 현재 이탈리아 배구가 세계 무대의 중심에 있지만 김 감독의 진출 당시에는 변방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세계 배구는 구 소련연방,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이 주름잡았다.


김 감독은 "하지만 이탈리아의 배구 프로리그는 활성화돼 있었다. 한 지역에서 일주일간 배구 경기를 펼친 당시 우리 배구와 많이 달라 놀랐다"며 "14개 클럽 중심의 리그는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탈리아 세리에A(1부리그) 맥시카노 파르마에 입단으로 이탈리아 무대를 밟은 그는 14개 팀 중 8위에 머물렀던 파르마를 2년 연속 우승한 명문팀으로 바꿨다. 리그 최우수선수(MVP),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이탈리아 기자단 선정 MVP 등 각종 상을 휩쓴 김 감독은 파르마의 핵심이었다.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한 번의 계기로 반전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이탈리아 무대를 밟은 김 감독은 이적 초기 힘들 수 밖에 없었다. 통역사도 없이 오롯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언어를 배워서 나간 게 아니었다. 세터이기에 선수들과 소통이 필요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림으로 그려서 나눠주고 설명했다. 손가락을 접어서 사인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소통을 해결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이적 2개월 만에 팀 동료와 충돌했다. 시대가 많이 변한 지금도 동양인은 종종 서양에서 무시당한다. 키 작은 세터였던 김 감독이 겪은 80년대는 동양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더욱 심했다. 다혈질적인 이탈리아 팬들은 김 감독이 적응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4000여 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센터였던 람프란코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경기 중 본인이 실수해놓고 지속해서 김 감독을 바라보며 성질낸 탓이었다. 경기장 안은 순식간에 빙하기가 온 것처럼 얼었다. 동양의 175㎝ 꼬마가 2m의 이탈리아 선수를 걷어찰 줄 아무도 예상 못했기 때문이었다.


김 감독은 "경기 후 동료들에게 '너희와 배구 다신 안 한다'고 말한 뒤 탈의실에서 씻지도 않고 나왔다. 놀란 구단에서는 회장까지 찾아와 나를 설득했다. 다행히 한국인 유학생의 통역 덕분에 서로간 오해가 풀려 다시 경기를 뛰었다. 그 일 뒤 선수들의 태도와 팬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팬과 언론에서는 '대단하다'고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감독은 승승장구했다. 선수들에게 볼을 배급하는 세터였기에 팀 동료들은 서로 잘 보이려고 노력했고 팀은 짧은 시간 안에 급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서 보고 배워 완성한 김호철 감독의 배구 철학
김 감독은 이탈리아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그는 당시 선수 생활 말미라고 할 수 있는 지난 1987년(당시 32세) 이탈리아 베테통으로 이적했다. 다시 이탈리아 무대를 밟은 그는 예상과 달리 8년을 더 뛰었다. 김 감독은 "체력 훈련하는 등 꾸준히 노력하고 부상 당하지 않게 무리하지 않았다.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있는 몸이었지만 꿈꾸던 감독을 하고 싶은 욕심에 은퇴한 것"이라며 "아마 선수로서 5년은 더 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스포츠의학의 발전과 체계적인 시스템 덕분에 마흔살 가까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선수가 나오고 있지만 과거 김 감독이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한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랜 기간 이탈리아 무대에서 경험하고 느낀 김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선진 배구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이탈리아 프로팀 감독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 지휘봉도 잡아 선진 시스템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이탈리아 배구는 90년대부터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데이터, 체력 등에 투자했기에 가능했다. 유명 외국인 감독을 이탈리아 리그에 불러 모아 훈련 방식도 많이 개선했다. 10년 넘게 투자해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는 등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며 유소년 육성을 강조했다. 시간을 두고 선수 개개인에게 맞는 훈련 덕분에 이탈리아가 발전했다는 게 김 감독의 생각이다.


◇한국 배구 발전하려면, 기틀 마련부터
한국 배구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배구사상 처음으로 전임 감독을 두기로 했다. 남자 대표팀 첫 사령탑의 주인공은 김 감독이다. 그는 이탈리아 무대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국내에서도 현대캐피탈과 러시앤캐시, 남자 배구대표팀 등을 역임했다. 한국 배구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는 김 감독은 발전을 위해 시스템 정비를 우선으로 꼽았다. 그는 "현재 우리 배구는 특색이 없다. 분업화되면서 기술도 사라졌다. 2m 높이의 선수들 모두 리시브가 되지 않아 다른 선수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과거에는 강만수(195㎝), 강두태(197㎝), 장현철(194㎝) 등 당시 장신의 레프트들도 리시브가 됐다. 큰 선수들도 기술이 있기에 가능했다"며 "장신 선수들은 기술을 배워야 할 중요한 시기에 성적이 우선된 풍토로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본기가 부족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토대부터 다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김 감독은 "내 임무는 성인 대표팀만 보는 게 아니라 유소년까지 신경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소년 감독들과 의논하고 프로그램을 짜서 선수 개개인 별로 육성하는 게 목표"라며 "내 4년 임기 내 결실을 볼 수 없지만 내 뒤를 이을 감독이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2018년, 발전과 성과를 동시에 이뤄야 해
배구대표팀은 오는 8월 제18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다. 병역 혜택이 걸린 대회이기에 결과를 놓칠 수 없다. 김 감독은 이 대회뿐만 아니라 2018 발리볼네이션스리그(월드리그), 2018 아시아배구연맹(AVC)컵 등도 함께 챙겨야 한다. 유소년 발전도 제외할 수 없다. 여러모로 할 일이 많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책임감을 갖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는 "4년 안에 두 마리 토끼(성적과 발전)를 다 잡아야 한다. 그래도 발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번 대표팀 소집도 오는 15일부터 2주간 선수들을 보기 위해 미리 일정을 잡았다. 각 팀의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선발해 파악한 뒤 연령별 대표팀 지도자들과 의논해 선수들의 훈련 방향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리 소집된 선수들은 AVC컵에 출전할 예정이다.


김 감독은 성적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아시안게임과 월드리그 모두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그는 "체력을 고려해 나눠 출전할까도 생각했지만 한 팀으로 운영할 구상이다. 하고자 하는 의욕있는 선수 위주로 선발할 것이다. 아시안게임과 월드리그에 출전할 선수들은 컨디션을 조절해 대표팀에 대한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선수들이 피곤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시안게임 전부터 조직력을 다지는 차원이다. 우리가 원하는 메달 색을 딸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시안게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신 월드리그가 힘들지 않도록 추가 인원을 더 선발해 로테이션을 돌릴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종착지는 한국 배구의 발전
임기 동안 성적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김 감독이 바라는 건 한국 배구의 발전이었다. 한국 배구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그는 "겨울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신체 조건이 좋거나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불러 모아 한 달간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할 생각이다. 유소년, 청소년 등 각급 지도자들도 모여 선수들을 확인하고 포지션별로 구분해 전문적으로 훈련할 계획"이라고 구상안을 내놓았다.


기술이 없다면 한국 배구의 발전도 없다고 바라본 김 감독은 시스템 정비를 통해 발전할 미래를 긍정적으로 관망했다. 그는 "현재 우리 배구는 장점이 없다. 다만 우리나라 특성상 손으로 하는 종목은 잘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선수들이 타고났다. 개개인의 장점을 살리는 배구를 만들면 좋아질 것"이라며 "우리나라 국민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다. 그게 우리의 잠재력이다. 유럽 선수들보다 신체적, 체력적으로 열악하더라도 시스템을 개선해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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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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