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선동열 감독, 지령 10,000호 인터뷰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스포츠서울 지령 10,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장강훈기자]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맺어준 인연이라도 되는 것일까. 한국 야구사(史)의 유일한 ‘국보’와 자타공인 1등 스포츠신문의 인연이 남다르다. 한국 야구대표팀 선동열(55) 감독은 ‘단짝’인 스포츠서울을 “운명 같은 친구”라고 정의했다. 그는 “같은 해에 데뷔해 함께 성장했으니 운명 그 이상의 연결고리로 묶여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월하노인이 선 감독과 스포츠서울을 붉은 실로 묶어둔 게 아니냐는 얘기가 그저 농(弄)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1985년 6월 22일, 스포츠서울이 한국 신문 사상 최초로 전면 가로쓰기라는 파격으로 세상에 빛을 본지 32년 여 만에 지령 1만 호를 맞았다. 당시 해태 투수였던 선동열은 스포츠서울 창간 열흘 만인 7월 2일 대구시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원정경기에서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러 1만 1960여 일을 동고동락했다. 한국 프로야구(KBO리그) 태동기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스타인 선 감독은 “함께 데뷔했다는 친근감 때문만은 아니다. 잘할 땐 아낌없이 칭찬을 해줬고 때로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까지 지적한 스포츠서울 덕분에 울고 웃으며 여기까지 왔다. 벌써 1만호라고 하니 내 일처럼 기쁘고 감회가 새롭다”며 껄껄 웃었다.

[포토] 선동열 감독, 지령 10,000호 인터뷰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스포츠서울 지령 10,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인터뷰하고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무등산 폭격기’ 역시 최고 애칭

현역시절 애칭인 ‘무등산 폭격기’는 스포츠서울의 작품이다. 선 감독은 “광주를 상징하는 산인 무등산에서 상대 팀에 폭격을 가한다는 의미를 지닌 애칭이라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다. 해태와 나, 광주 시민들의 자부심을 드러낼 수 있는 애칭이라 처음 지면을 통해 접한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며 웃었다. 그는 작고한 이종남 전 이사를 비롯해 신명철, 이성춘, 황덕준 등 당시 해태를 담당했던 스포츠서울 출신 기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하며 “나를 밀착마크하는 기자까지 있었으니 당시 스포츠서울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포츠서울이 내 담당기자를 배치하자 다른 매체에서도 해태 담당기자를 늘리는 등 경쟁이 치열했다. 그래도 원조는 맛이 달라서 허심탄회한 얘기도 참 많이 나눴다”고 돌아봤다.

지나고보면 무등산 폭격기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단초도 스포츠서울의 특종 덕분이었다. 선 감독은 “귀띔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모두가 요미우리를 외칠 때 스포츠서울만 주니치행을 특종보도했을 때 ‘역시’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 친한 기자들한테 ‘어떻게 알았어?’라고 물어도 답을 안해주더라. 나중에 이리저리 끼워맞춰 보니 스포츠서울의 정보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니치행 특종 보도 스포츠서울이라 가능

‘국보’의 해외진출은 스포츠서울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매체의 최대 관심사였다. 역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공식 해외진출이라 과연 그 구단이 어디인지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스포츠서울은 1991년 한일 슈퍼게임 때부터 일본프로야구 구단에서 선동열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선 감독은 “당시에는 구단 허락 없이 해외리그로 진출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프리에이전트(FA)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학 시절에는 병역문제도 해결해야 해 사실상 길이 없었다.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당시 해태 박건배 구단주께서 허락을 해주셔서 해외진출이 급물살을 탔다”고 돌이켰다. 1995년 메이저리그 보스턴이 해태와 협상 테이블을 차렸는데 트레이드 형식에 이견이 생겨 결렬된 뒤 일본 구단들이 치고 들어왔다. 최고 명문 요미우리를 비롯해 주니치와 오릭스가 ‘선동열 영입작전’에 뛰어 들었는데 당시 여론은 ‘국보라면 당연히 요미우리로 갈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선 감독은 “그 당시에는 ‘이번에도 해외진출에 실패하면 은퇴하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 구단이 전적으로 협상을 펼칠 때라 나도 내가 어느 팀으로 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스포츠서울이 주니치 행을 특종으로 썼다. 보도가 나오기 직전 구단으로부터 언질을 받았던 터라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포토] 선동열 감독, 지령 10,000호 인터뷰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스포츠서울 지령 10,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SUN이 밝힌 주니치행 진짜 이유

선 감독이 직접 밝힌 주니치행은 당시 주니치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LG 구본무 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박 구단주께서 친분이 두터웠던 구 회장과 내 거취를 두고 상의를 했는데 ‘주니치로 가는 게 여러 면에서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20년도 더 지난 얘기지만 선 감독은 스포츠서울에 처음으로 주니치행을 결심하게 된 진짜 이유도 공개했다. 그는 “1995년 한·일 슈퍼게임 6차전(11월 12일)이 나고야 구장에서 열렸다. 당시 주니치 이토 단장께서 나를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일 때였는데 함께 탄 택시 안에서도 ‘앞으로 주니치에서 뛰게 될 특급 투수’라고 소개를 하더라. 일본어를 전혀 모를 때였는데도 택시 기사께서 정말 좋아하셨던 기억이 있다. 놀라운 사실은 내릴 때 택시 요금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태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이라 택시 기사의 친절과 환대가 광주의 정서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때 ‘내가 있을 곳은 나고야’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가량 지난 11월 20일, 스포츠서울은 ‘선동열 주니치!’를 1면에 단독 보도했다. 그는 “그렇게 주니치에 입단한 뒤 스포츠서울 기자들이 보름짜리 비자(당시에는 일본 최대 체류 기간이 15일이었다)를 받아 번갈아 가며 왔다. 그 때 스포츠서울과 더 돈독한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 친구는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것

생애 첫 2군 생활을 할 때 선 감독 옆을 지키던 이는 스포츠서울 담당 기자들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어려울 때,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이들은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 뙤약볕에 서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준 당시 스포츠서울 기자들에게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투구 밸런스 붕괴를 이유로 2군으로 떨어졌을 때 ‘국보’가 느낀 참담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지난해 작고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태극기를 내려놓고 오직 너를 위해 던져야 한다”고 따가운 충고를 하기도 했다. 첫 해외진출 선수라는 자부심이 ‘내가 실패하면 후배들의 길이 막힌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오니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선 감독은 “2군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보자’는 마음을 갖고 매달렸다. 마침 3군에 계시던 이나바 미츠오 코치께서 ‘1991년 한일 슈퍼게임 때 투구폼을 기억하고 있으니 무너진 밸런스를 찾아보자’고 제안해 11월 휴가도 반납하고 나고야에서 재기의 몸부림을 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 선 감독의 옆을 묵묵히 지킨 것도 스포츠서울 취재기자들이었다. 선 감독은 “당시 스포츠서울은 내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인데도 질책 대신 따뜻한 기사로 기운을 북돋아 줬다. 훗날 지도자가 됐을 때 당시 기분을 되살려 질책보다 칭찬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든다”고 말했다.

[포토] 선동열 감독, 지령 10,000호 인터뷰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스포츠서울 지령 10,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인터뷰하고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은퇴 결정도 스포츠서울과 함께

야구 인생을 통털어 가장 파란만장했고 기억에 오래 남은 일본 생활 청산은 그의 은퇴와 맞닿아 있다. 당시 선 감독은 스포츠서울 담당 기자에게 “은퇴시점이 중요하다. 현역에 연연하다가 시기를 놓치면 절대 안된다.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1999년 주니치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직후 본지 기자에게 “우승하고 보니 나도 선수로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됐다”고 현역 은퇴를 시사했다. 은퇴를 공론화할 즈음 메이저리그 보스턴이 다시 한 번 러브콜을 보냈다. 하와이로 우승 여행을 떠나 있을 때 보스턴과 시애틀 등이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신분 조회를 의뢰하는 등 본격 행보에 나섰다. 선 감독은 “은퇴를 번복할까, 솔직히 고민했다. 그런데 댄 듀켓(현 볼티모어 단장) 단장이 일본에서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시기가 차일피일 미뤄지더라. 그 핑계가 ‘구단 임원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입단 테스트 얘기까지 나왔다. 깔끔하게 은퇴를 결심한 진짜 이유”라고 설명했다. 2000년 3월 나고야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와 시범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졌는데 당시 호시노 감독을 포함한 선수단 전원이 선 감독의 유니폼에 ‘제2의 인생도 반짝 반짝 빛나라’는 메시지를 담아 사인을 해줬다. 당시 유니폼을 꺼내든 선 감독은 “세월 참 빠르다”면서도 현역 때와 큰 차이 없는 몸매를 과시했다.

[포토] 선동열 감독, 지령 10,000호 인터뷰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스포츠서울 지령 10,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있다. 2018.02.21.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한국야구 발전, 함께 만들어 가즈아

KBO 홍보위원을 거쳐 삼성, KIA 감독을 역임한 뒤 사상 첫 대표팀 전임 감독에 오를 때까지도 스포츠서울은 선 감독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봤다. 그는 “창간 때부터 함께 한 스포츠서울의 지령 1만호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이 전에도 한국 야구계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따뜻한 눈길을 균형있게 다뤄 여론을 선도했던 국내 최고 스포츠 전문지라는 자부심을 스포츠서울 구성원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친근감 있는 매체로 독자들 곁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하다보니 잊혀지는 것들이 많은데 신문은 역사를 기록하는 장이라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정규시즌 개막과 함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엔트리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할 예정인 선 감독은 “한국 야구가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부족하다. 아마추어부터 시스템 개편을 통해 백년대계를 그려야 한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스포츠서울이 한국 야구 발전을 함께 만들어가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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